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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도 아빠가 있었다

2024년6월19일_수요글방

by 오밀조밀

스무살이 되던 해 처음으로 집을 떠났다. 짐을 한가득 싣고 여행을 가는 기분으로. 생애 첫 타지 생활, 말로만 듣던 기숙사라는 공간. 최소한 한 계절은 날 수 있는 짐을 챙겨야 했다. 기숙사 입실은 입학식 당일부터 가능했다. 오히려 잘 됐다. 아빠와 동생이 내가 다닐 학교를 둘러볼 김에 함께 왔는데, 기숙사 짐까지 옮길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아마 엄마는 아르바이트를 간 상태였을 거다.


본관에 마련된 커다란 홀에서 진행된 입학식이 끝나자마자 캠퍼스의 가장 안 쪽에 있는 기숙사로 향했다. 지은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생애 첫 타지 생활, 말로만 듣던 기숙사라는 공간을 눈 앞에 두고 조금은 우울해진 나를 보던 아빠는 “기대했던 것보다 더 좋다”며 분위기를 띄웠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내 성적대로라면 갈 수 없는 곳이었다. 열세살이 되던 해, 무언가에 쫓기듯 아빠를 따라 다녀온 미국. 영어권 국가에서 3년을 지내다 왔다는 이유로 별도 전형으로 입학을 했다. 당시만 해도 또래보다 영어를 정말, 아주 조금 잘하긴 했지만, 수능용 영어는 아니었던 탓에 그도 오래가진 못했다.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지내기를 3년. 교대를 제외하고 아마 지방에 있는 대학으로 간 졸업생은 나 하나였을 거다. 열아홉 겨울, 생각했던 것보다 적나라한 결과 앞에 슬펐지만 울 순 없었다. 그런 마음으로 아빠 차를 타고 2시간 가까이 달려 온 캠퍼스에서 난 울지도 그렇다고 웃지도 못했다.


동생은 “캠퍼스가 넓어서 좋다”고 했고, 아빠는 “건물들이 멋있다”며 내 표정을 살폈다. 그렇게 우린 기숙사에 짐을 풀고 나와 학교 정문 앞 상가에 있는 중국집에서 조금 늦은 점심을 먹었다. 학교 앞, 하숙집 현수막이 가득한 아파트 단지의 상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규모의 상가 2층에는 열개 남짓 테이블이 놓여있었다. 자장면과 탕수육을 양껏 시키고 아빠와 동생과 함께 아주 맛있게 먹었다.


대학을 다니는 내내, 그리고 졸업하고도 한동안 우린 종종 그 중국집 이야기를 하곤 했다. 입학식을 마치고 기숙사에 짐을 푼 뒤 아파트 단지 상가에서 먹은 자장면과 탕수육. 그날 우리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세세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그날의 분위기가 선명히 남았다.


대학을 다니던 중 아빠는 금요일이나 일요일 저녁 차를 타고 날 보러 오곤 했다. 1년에 한두번정도. 자주는 아니었지만, 아빠는 와서 근처에서 밥을 같이 먹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지만, 기숙사 생활을 하며 잘 챙겨먹지 못하는 과일들을 챙겨 오기도 했다.


대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아빠에게 문자를 보내고 잠이 들었다. 그 다음날이 되어도, 그 다다음날이 되어도 아빠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았다. 학교 수업을 가고 동아리 활동을 하며, 아빠에게 보낸 문자가 기억에서 흐려졌다가 다시 떠올랐다. 엄마는, 아빠가 중국에 일을 하러 갔다고 했다. 하루 아침에, 이렇게나 갑자기.


그렇게 한국을 떠났다는 아빠는 3~4년이 지나서야 다시 돌아왔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다닐 때였다. 아빠는 대학 입학식 때만 가고 졸업식은 보지 못해 아쉬웠다며, 대학원 졸업식을 보러 왔다. 아빠와 엄마, 동생과 함께 잔디밭에서 사진을 찍었다. 내 학사모를 쓴 엄마의 모습도 여러장 남겼다.


군데군데, 알갱이가 조금 빠진 옥수수마냥 기억이 비어있지만 그래도 아빠와 함께했던 봄날 같은 시간들. 그 시간 속엔 나도 동생도, 엄마도 편안했고 많이 웃었다. 1년 365일, 매일이 행복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좋았고 좋았다.


그 이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아빠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모두가 그대로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데, 단 한 사람. 아빠만 쏙 빠졌다. 아빠는 중국에 사업을 한다고 몇 번을 더 갑자기 사라졌다. 그러다 한국으로 돌아와 좁은 집에서 네 식구가 함께 지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흘렀을 때, 이번엔 지방에서 일을 한다고 집을 떠나는 날이 잦고, 길어졌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는 집을 떠나 지내기 시작했다.


난 가 본 적도 없는 어느 동네에서 60대 남성이 사고를 당했다거나, 처음 듣는 외국의 한 도시에서 60대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남성이 사고 났다는 뉴스를 볼 때 종종 생각한다. 혹시 아빠일까? 아빠가 저 동네에, 저 나라에 가 있진 않겠지? 하고.


종종 주고 받던 카카오톡 메시지도 더는 오가지 않는다. 내가 조금 상냥하게 안부를 전하면 금새 답장을 보내올 거란 걸 안다. 하지만 굳이 내가 먼저 메시지를 보내지 않는다. 설령, 아빠가 메시지를 보내온다고 해도 난 구구절절 답장을 보낼 마음도 없다.


내가 태어나고 스무해를 지나서까지 함께였지만, 그 이후로 10년정도 내 삶의 반경에서 벗어난 아빠. 분명 있었는데, 정말 있었던 건지 조차 가물가물할 정도로 이제는 완전히 동떨어져 버린 아빠. 아빠가 정말로 이 세상을 떠나는 날이 오기 전까지, 그리고 그걸 두 눈과 귀로 확인하기 전까지. 나는 늘, 낯선 곳에서 60대 남성이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아주 잠깐은 멈칫하는 삶을 살아야 할 거다.


종이 위에 연필로 꾹꾹 힘을 줘 눌러 쓴 ‘아빠’라는 두 글자를, 아주 잘 지워지는 지우개로 깨끗하게 흔적도 없이 지운 것처럼. 분명 있었는데 없어졌고, 무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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