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1월10일_수요글방
31년간 열일한 아빠의 퇴직. 거실을 배경으로 한 식탁 앞에서 한 장. 그리고 좋은 레스토랑에서 한 장. 오랜 친구가 SNS로 아버지의 퇴직을 기록했다. 친구의 아버지를 처음 본 건 지금보다 한참 전이었다. 20대 중반에 만난 그 친구는 매년 적어도 한 번씩은 부모님, 여동생과 다같이 여행을 간다고 했다. 그리고 어느 해 여행을 다녀온 친구에게 사진을 구경하고 싶다고 했고, 그때 친구의 아버지를 처음 봤다.
늘 그 친구만 보다가 친구의 아버지를 보니 “너희 아빠 완전 너랑 똑같다”고 말했다. 아니지, 친구가 아버지를 닮은 거지. 친구는 “동생보다 내가 아빠를 더 닮았다”며 웃었다. 그 이후로 10년이 다 된 지금까지도 매년 그 친구는 SNS나 메신저 프로필 사진으로 가족여행을 기록한다.
나도 매년은 아니지만 종종 가족여행을 가곤 했다. 아빠와 자주 붙어있던 때의 나는 학생이었고, 여행을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던 나이였다. 학교와 집을 오가기 바빴던 나와 내 동생은 어디 멀리 여행가고 싶다는 말도 잘 하지 않았다. 맛있는 저녁을 먹으러 나가거나, 어느 토요일 경기도를 벗어나 근교로 가는 게 대부분이었다. 어디든 좋아서였을까. 국내든 국외든 중요하지 않았다.
어릴 적 나는 아빠보단 할아버지와 가까웠다. 일로 바쁜 아빠보다, 조금은 덜 바쁜 할아버지와 엄마와 나, 동생을 챙겼다. 용돈을 한 번이라도 더 챙겨주는 건 할아버지였다. 하지만 나는 아빠가 더 좋았다. 할아버지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나에게 모든 걸 줬고, 그에 비해 아빠는 조금 덜 줬다. 그래도 좋았다.
차를 타고 아파트를 나서던 중 엄마와 내가 상가에 들렀다. 상가는 차선 반대편에 있었다. 엄마와 내가 상가를 나오니 아빠가 운전하는 차는 여전히 상가 맞은 편에 있었다. “할아버지는 항상 차를 돌려서 상가 앞에 서 있는데 아빠는 왜 안 그러냐”며 묻던 날도 있었다. 이젠 더는 오지 않을 순간이다.
어린 나는 아빠와 꽤 가까웠다. 중고등학생 때 아빠가 어렵다는 친구들에게도 “난 아닌데”라고 말하며 아빠를 떠올리곤 했다. 아빠는 나와 동생의 이야기를 잘 들어줬고, 공부를 하는 게 전부였던 때엔 공부를 도와주기도 했다.
수학과 역사를 잘 알던 아빠가 대단하게 보였던 때가 있었다. 동생은 아빠의 머리를 닮아 이것저것 잘 해냈다. 하지만 난 시간이 흐를수록 공부와 멀어졌고, 그렇게 집에서도 멀어져 낯선 지방으로 가야 했다. 친구들 중 유일하게 집을 떠나야 했던 나에게 아빠는 “어디서든 열심히 잘 해내면 된다”며 기죽지 말라고 했다.
대학 입학식 날, 아빠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온 가족이 대전으로 내려갔다. 입학식은 채플처럼 진행됐고, 아빠는 “기대했던 것보다 좋다”며 느낌이 좋다고 했다. ‘기대했던’이 아닌 ‘생각했던’이 아닐까 싶었지만, 굳이 정정하진 않았다. 아빠는 어떻게든, 이미 바닥까지 내려간 나의 자존감을 끌어올리려고 애 썼던 거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대학을 졸업하고 일을 시작했다. 어린 시절 펀드매니저가 직업이던 아빠는 어느 샌가 할아버지 뒤를 이어 목회를 하겠다며 공부를 시작했다. 신학 대학원 입학과 동시에 학업에 푹 빠진 아빠는 정말 즐거워 보였다.
나이가 들어서야 알았다. 아빠는 하나에 빠지는 속도가 누구보다 빠르고, 손을 떼는 속도도 그 누구보다 빠르다는 것을. 아빠가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는지 알 수는 없다. 대학원 학기를 지내던 중 가족을 떠났다. 솔직히는 ‘버렸다’고 하고 싶지만 아빠는 번번이 ‘멀어졌다’고 표현했다. 자연스럽게 멀어진 것이란 게 아빠의 설명이지만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대학원 공부에 그 누구보다 빠르게 빠져들면서 하고 있던 일도 그만 뒀다. 아빠는 내가 대학에 간 이후부턴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직업란’에 쓸 만한 ‘직업’이란 게 뭔지 정확히 말하지 않았다. 어렴풋이 무언가 하고 있겠지 생각했다. 그쯤부터 ‘중국 선교’에 사명을 받았다는 이유로 한국을 떠나 있었으니, 알 길이 없었다. 평생 일을 해 본적 없는 엄마가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할아버지가 정년을 다 하고서도 간간히 대학 강의를 나가야 했던 것도 모두 그 무렵이다.
원망이란 싹이 텄다. 원망 대상은 명확했지만 눈 앞에 보이지 않으니 탓할 방법도 없었다. 할아버지는 아들에게 상냥한 아빠가 아니었다. 중국에서 돌아온 아빠와 할아버지의 사이가 좋아질 리도 없었다. 할아버지는 네명이서 살던 집을 팔고 집값의 일부를 아빠와 엄마에게 떼 줬다. 우리는 그 돈으로 근처로 이사를 갔고, 할아버지도 작은 오피스텔을 얻었다.
할아버지가 준 돈으로 넷이서 살긴 좀 좁은 집을 구했다. 집이 좁아서였을까. 아빠는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났고 해가 바뀌었을 때쯤 엄마는 이사를 가야 한다고 했다. 이유를 묻진 않았다. 이사를 가기로 한 집은 차로 30분 거리였는데, 그쪽 동네에선 건물 이름만 대도 누구나 알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다. 넷이서도 겨우 산 집 보증금을 빼서 옆 동네 트레이드마크로 이사를 가는 게 말이 되나 싶었지만 이유를 묻진 않았다.
시간이 지나서야 알았다. 좁은 집의 보증금을 빼 그 일부는 아빠가 어디엔가 썼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다. 문제는 그 이후부터였다. 트레이드마크에 얻은 집은 전세도 아닌 월세였고, 몇 달이 지나자 할아버지가 준 돈도 다 써 월세를 낼 돈이 없었다. 월세가 80만원에 가까웠다는 건 그제서야 알았다.
몇 달은 엄마가 어떻게든 마련했고, 나도 보탰지만 결국 끝으로 내몰렸다. 보증금에서 월세가 나가기 시작했고 불행 중 다행히도 그 무렵 계약이 끝났다. 아빠는 이사할 때가 되자 같은 건물의 작은 평수로 가는 건 어떻냐고 했다. 작은 평수의 월세를 많이 낮춰 잡아 50만원이라고 한들, 그 돈을 매달 낼 수 있냐고 물으니 방법은 어떻게든 생긴다던 아빠의 말에 방법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때부터였다. 주도권은 앞으로 월세를 꾸준히 낼 수 있는 나에게 있었다. 엄마와 나는 가까운 동네 곳곳을 다녔다. 낡은 상가의 꼭대기 층에 가정집이 있다는 걸 그쯤 처음 알았다. 상가엔 도어락이 없었고, 꼭대기 층과 그 아래 층 사이 철문만이 유일한 안전장치였다.
그렇게 원래 살던 곳에서 1시간 떨어져 있는 동네로 이사를 갔다. 그 집이 바로 그때 세탁기가 고장났던 1.5룸이다. 그 시기 아빠는 신학 공부에 푹 빠져 있었고, 집엔 잘 오지 않았다. 아니 거의 없었다. 엄마는 “아빠한테 도어락 번호를 알려줘도 되냐”고 물었고 나는 “벨 누르고 들어와야지”라며 에둘러 말했다.
예전처럼 아빠와 한 집에서 살긴 어렵겠다는 생각은 현실이 됐고, 이 마저도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다. 31년간 한 직장에서 일을 하다 퇴직한 친구의 아빠 사진을 보며 ‘친구와 닮았다’는 생각은 잠시였다. 나와 함께 살던 아빠는 왜 한 직장에서 진득하니 일을 하지 못했고, 왜 우린 아빠의 새로운 출발을 직접 응원해줄 수 없는 사이가 돼 버렸는지. 사실 이 생각이 머릿속에 더 오래 머물렀다.
올해로 서른 다섯, 앞으로 서른 다섯 해를 더 살 더라도 아빠와 차를 타고 집 앞 상가에 들를 일은 없을 거다. 학생 때 공부를 도와줬 듯 직장에서 힘든 일을 털어놓고 조언을 해 줄 일도, 자신감과 자존감이 바닥을 뚫고 내려갔을 때 옆에서 용기를 북돋아줄 일도 없겠지. 아빠와 한 집에 살 일이 없어서지만, 그와 동시에 올해로 예순 둘이 된 아빠가 앞으로 서른 다섯 해를 건강히 살아있을 거란 보장도 없지 않나.
만으로 예순이던 지난해 생일날, 아빠에게 닷 돈으로 만든 열쇠를 선물했다. 아니, 종종 아빠와 만나 밥을 먹는 동생에게 “갖다 주라”며 해치우 듯 던져줬다. 늘 곁에서 지내는 엄마에게도 세 돈으로 만든 팔지를 줬는데 아빠에게 닷 돈을 준 건 무슨 마음이었는지 모른다.
돈으로 때우자는 건 아닌데. 어쩌면 오래 전 그날. 상가에서 나와 아빠 차로 가던, 남편의 조카이자 이제 내 조카가 된 아이와 같은 10살이었던 그 순간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점점 공부를 하기 힘들어했던 나를 책상 앞으로 끌어다 앉혀줬던, 아니면 집에서 2시간 걸리는 대전까지 차를 몰고 가 마음으로 우는 나를 애써 달래주던 기억 때문이었을까.
중국 선교를 가 있던 아빠가 보내온 편지들이 며칠 전 짐 정리를 하다 나왔다. ‘목숨보다 사랑하는 우리 딸들’이라고 아빠가 직접 펜으로 눌러 쓴 글씨들을 보면서 아무 감정이 들지 않았다. 평소 감정대로라면 ‘역겹다’거나 ‘거짓말’이라고 한번쯤 생각할 만도 한데 정말 아무 감정도,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만큼 어느새 나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돼 버렸구나. 이제서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