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7월24일_수요글방
할아버지가 없는 할아버지 집에 모여 앉았다. 고모네 집과 걸어서 3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건물의 1층, 투룸. 70이 다 되어서까지 사람들을 만나고 호탕하게 웃고 큰 소리를 치던 할아버지는 말년을 이곳에서 보냈다.
“올해가 할아버지 마지막 생신일지도 몰라.”
엄마의 예상과 달리 할아버지는 그로부터 10년도 훌쩍 넘게 살았다. 할아버지는 날이 더워지기 시작한 6월의 끝자락에 고모네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건물의 1층 투룸, 안방에서 화장실을 가려다 넘어졌다. 넘어진 채로 얼마나 바닥에 누워있던 걸까. 매일 아침 할아버지 집으로 출근을 하던 요양보호사가 할아버지를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다.
눈을 뜬 채로 천장을 응시하고 있는 할아버지 얼굴을 쳐다보다 팔에서 손, 손에서 다리, 다리에서 발로 시선을 내렸다. 시간이 흘렀구나. 나는 자랐고 할아버진 작아졌구나. 고모는 애써 괜찮다고 말했고, 허겁지겁 병원으로 달려온 나는 여동생, 사촌동생들과 함께 있다가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 회사에 도착하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장례가 끝나고, 할아버지가 살던 공간에 둥그러니 모여 앉아 우린 밥을 먹었다. 고모네 네 식구와 우리 네 식구. 조금 늦게 도착한 아빠는 뒤늦게 밥을 먹었고, 옹기종기 안방에 보여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우리들 사이에서 고모부를 불러냈다. 옆에 작은 방에 아빠와 함께 들어간 고모부는 문을 닫고, 아주 짧은 시간 대화를 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고모부는 방문을 열고 나와 그대로 현관으로 향했다. 2018년 7월로 막 접어든 때. 현관문을 열고 나가던 고모부의 뒷모습.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알 수 없지만, 그 뒷모습 그게 마지막이었다.
할아버지의 장례에는 조문객들이 많이 왔다. 고모와 고모부가 함께 다니고 있는 교회에서, 고모부가 일하는 학교에서, 엄마가 다니는 교회에서,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왔다. 그래도 할아버지 앞으로 온 손님들이 더 많았다. 조문객 수가 더 많았으니 조의금도 더 많았다. 고모와 고모부가 다니는 교회에서, 엄마가 다니는 교회에서 사람들이 꽤 왔지만 금액은 비할 게 안 됐다.
할아버진 한 의과대학에 몸을 기증했다. 장기가 아니라 몸 전체를. 그래서 장례를 마치고 화장을 하지도 관을 들 일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 여덟 식구는, 장례를 마치고 할아버지가 나중에 묻힐, 지금은 할머니 혼자 누워있는 묘에 들렀다. 조문객들이 낸 조의금 봉투를 정리해 담아둔 커다란 가방은 아빠의 차 트렁크에 넣어둔 채로, 우린 묘에 가서 잠시 시간을 보내다 근처에서 자장면을 먹었다.
할아버지가 눕게 될 묘, 할머니 혼자 20년 넘게 누워있던 자리를 갔던 그날. 아빠는 차 트렁크에 있는 조의금 중 고모와 고모부 앞으로 들어온 돈을 고모네 집으로 보냈다. 엄마 앞으로, 내 앞으로 들어온 조의금도 각각 보냈다. 보낼 곳 없는, 할아버지 앞으로 온 조의금은 아빠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아빠는 할아버지에게 살가운 아들이 아니었다. 점점 쇠약해진 할아버지를 딸의 남편, 고모부가 케어한 것만 봐도 그렇다. 고모부는 할아버지의 샤워부터 대소변까지 일일이 챙겼다.
물론 아빠는 아빠만의 사정이 있다. 할아버지와 멀어진 사연이 아빠의 마음 속에 큰 상처로 남아있을 것을 나는 안다. 아빠가 갖고 있을 감정, 상처 속에서 굳이 따지자면 나는 아빠 쪽으로 더 마음이 기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할아버지 앞으로 들어온 조의금을 전부 챙겨갈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엄마와 동생은, 아빠도 아빠지만 그 날 그렇게 뒤돌아 나간 고모부에게도 화살을 돌린다. 그날 난 고모부와 아빠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고모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날 이후, 나는 매년 고모부의 생일에 메시지를 보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6월 25일, 그리고 그 다음날인 6월 26일. 고모부의 생일이다. 할아버지가 떠나기 직전까지 몸 구석구석을 닦아주고 화장실까지 챙겨줘서일까.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추억하다 보면, 어느새 고모부의 생일 날이 밝아 온다. 고모부는 언제나 짧게 답했다. 몇 년 뒤 고모부의 아버지, 고모의 시아버지, 사촌동생들의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엄마와 나는 장례식장을 찾았다. 영정 사진 앞에서 고모부는 우리에게 눈인사를 했다. 그게 다였다. 나와서 이야기를 나누지도, 조문을 하고 식사를 한 뒤 떠나는 우리에게 인사를 하지도 않았다. 고모부도, 우리와 멀어진 사연이 고모부의 마음 속에 큰 상처로 남아있겠구나, 생각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 내가 결혼식을 앞둔 2022년 여름의 어느 날. 고모부는 결혼식에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고모네에 청첩장을 줘야 하는데, 고모만 만나서 주는 것도 이상했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고모부가, 내 청첩장을 받으러 나오는 건 더 이상했다. 며칠을 고민하다, 고모에게 청첩장을 주러 가겠다고 연락을 했다.
“고모부도 그날 시간 된대, 식당은 고모가 찾아볼게~”
4년 만이었다. 고모부와 눈을 맞추고 마주 앉은 게. 정확히는 4년하고 몇 개월 더 지났을 때였다. 나에게 고모부는 정직한 사람, 좋게 말하면 원칙주의자 나쁘게 말하면 노잼. 하지만 난 어릴 때부터 고모부를 정말 좋아했다. 그래서 4년 만에 만났지만, 그 사이 우릴 모른 체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큰 손녀 결혼식 때 같이 입장할 정도로 건강해야지~”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진 버릇처럼 말했다. “네 아빠 대신 할아비 손을 잡고 들어가는 건 어떻냐”고. 그 말을 들은 난 질색을 했지만, 할아버진 굴하지 않고 버릇처럼 말했다. 2018년 6월에 떠난 할아버지가 보내온 선물일까. 내 결혼식에 할아버지 대신 고모부를 보내준 걸까. 고모부와 오랜 만에 같이 밥을 먹으며, 결혼식을 어떻게 준비해 왔는지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는지 실컷 이야기를 했다. 4년이 아닌 사흘만에 만난 사람처럼.
그 이후, 최근에 고모부가 많이 아팠다는 사실을, 고모에게서 뒤늦게 들었다. 눈이 아팠다고 했다. 잘못하면 시력을 잃을 수도 있는 병이었다고. 내 사촌 여동생, 고모와 고모부의 둘째는 내가 결혼을 한 뒤 2주 뒤에 결혼을 했다. 고모부는 딸의 결혼식을 보지 못할 거란 생각에 빠졌고, 그 생각의 끝에 조카인 내가 떠올랐던 걸까. 이유야 어찌되었든, 고모부가 아팠다는 사실이 조금은 감사하기도 했다. 물론 지금 다 회복되었으니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어디서부터 할아버지가 준 선물이었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