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1월17일_수요글방
앞에 서 있는 아이는 이곳과 어울리지 않았다. 엄마 손을 꽉 잡고 있는 걸 보면, 엄마를 따라 온 것일까. 늦은 밤, 조문객은 대부분 40대 그 이상이었다. 아이 엄마의 나이를 가늠해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방명록에는 아이의 엄마가 이름을 썼다. 아, 엄마가 조문을 하러 온 거구나. 그래도 어울리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을 찾은 조문객들은 정말 젊어야 40대, 보통 50대 이상이었다. 40대 이하는 나와 사촌동생들의 지인이 전부였다.
아이의 엄마와 눈인사를 하고 방명록을 쳐다보다 조의금을 넣는 손끝으로 시선을 옮겼다. 따라붙는 내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었을까. “얘가 인사 드리고 싶다고 해서요, 교장선생님이셨거든요.” 아이의 엄마는 차마 내가 입밖에 내지 못한 질문에 답을 했다. “네, 감사합니다.” 조문객을 맞던 나와 내 사촌동생은 살짝 웃으며 인사했다.
나와 사촌동생은 같은 초등학교를 나왔다. 아이와 아이의 엄마가 떠난 자리에서 “우리 학교 다닐 때 교장선생님 기억나냐”며 어이없는 표정으로 웃었다. 아이는 중학생쯤 돼 보였다. 물론 우린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20년이 다 됐고, 그 아이는 오래돼 봤자 3년이겠지.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 늦어진 시각, 물 밀 듯 오던 조문객들이 다 떠나고 한산해졌을 때. 빈소 데스크에 있는 전화기가 울렸다. 빈소 데스크 전화기는 나와 내 사촌동생이 “비품이 추가로 필요하다”고 장례식장 사무실에 전화할 때나 쓰던 거라, 수신이 가능한 전화라는 걸 그때서야 알았다.
전화를 건 사람의 목소리가 꽤 멀게 느껴졌다. 어디에서 전화를 건 건지 알 수 없었다. 이름을 대며 자신을 소개하던 그 사람은, 할아버지의 아주 오래된 제자라고 했다. 장례식장을 직접 찾아오고 싶었는데 서울에 올라가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이렇게나마 가족들에게 인사를 건넨다고 했다. 좋은 선생님이셨다고, 오래 기억하고 있다며 명복을 빈다고 했다.
아마 그 사람은 나에게 서울로 오기 어려운 이유와 기억 속 할아버지의 모습들을 늘어 놓았을 거다. 하지만 난 전화가 왔다는 것만 기억날 뿐, 통화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오래된 제자였다’는 첫 마디에 시간도, 숨도 멈췄다. 그 전화를 받았다는 것, 그 기억이 내 기억의 전부다.
내가 한참 더 나이가 들어, 오래 전 나를 가르치던 선생님의 부고 소식을 접한다면 나는 장례식장을 찾아갈까. 부득이하게 장례식장까지 가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장례식장 대표번호로 전화를 걸어 고인의 이름을 대며 그 빈소로 전화를 연결해달라고 할까. 그럴 만한 선생님도 없지만, 그럴 만한 선생님이 있다고 해도 못 가면 못 가는 대로, 침대에 누워 잠 들기 전 눈을 감고 잠시 기도나 하고 말겠지.
우리는 할아버지를 ‘청년’이라고 불렀다.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고 밖에서 한참 시간을 보내다 밤 10시쯤에나 집으로 돌아오는 할아버지를 보며 “우리보다 청년, 완전 청년”이라며 추켜세웠다. 나와 내 동생, 그리고 사촌동생들도 친구가 많고 밖에서 시간을 보내기 좋아하지만 할아버지만큼은 아니었다.
밖에서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할아버지지만 그렇다고 가족들에게 소홀한 적도 없었다. 우리가 초등학생이었을 때부터 주말이면 고모네 식구와 함께 식사를 했다. 집에서 밥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기도 했고, 명절이면 윷놀이를 몇 판이나 하고도 집에 가지 않았다. 어릴 때 할아버지가 알려줬던 카드 게임을 하기도 했다. 스무고개도 하고 끝말잇기도 하며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 가운데엔 늘 할아버지가 있었다.
할아버진 어딜가나 첫째인 내가 먼저였다. 평생 그랬다. 내가 태어난 이후부터 우리가 커 가는 내내 그랬다. 내가 대여섯살이던 때 할아버지가 출장을 간 사이, 같은 아파트에 살던 두 살 많은 언니가 세발자전거가 생겼다며 동네방네 혼자 타고 다녔다. 한 번만 태워달라며 졸졸 따라다녔지만 한 번도 태워주지 않았다. 집에 와서 얼마나 떼를 썼는지.
할아버지는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세발자전거를 샀고, 차에서 짐을 내리기도 전에 세발자전거부터 내렸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언니의 세발자전거엔 뒷좌석이 없었는데 할아버지가 사온 자전거엔 뒷좌석이 있었다. 내가 자전거를 타면 뒤에 친구 하나를 태울 수 있었다. 난 그날 이후 동네방네 그 자전거를 타면서도 같은 아파트에 사는 그 언니를 한 번도 태워주지 않았다.
그 이후 네발자전거 그리고 네발이 두발이 됐고,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선 더 큰 두발자전거를 샀다. 그 모든 자전거들의 첫 주인은 다 나였다. 두번째 주인은 나보다 두 살 어린 사촌남동생이었고, 세번째가 내 동생이었다. 맨 마지막은 나보다 여섯 살 어린 사촌여동생이었다. 어린시절 사진 속 우리가 타던 자전거는 모두 같았지만, 새 걸 탔던 건 나 하나였다.
할아버지와 멀어진 건 고등학생 때부터였다. 아니, 그 이전부터 그런 낌새가 보였다. 사촌남동생은 공부를 정말 잘했다. 내 동생도 잘했다. 나와 두 살, 세 살 터울이라 또래라고 할 순 없지만 나이를 감안하더라도 나와 차이가 컸다. 나는 공부에 흥미가 없을뿐더러 왜 잘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찾기 바빴다.
나는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면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성격인데, 공부를 못 하니 성취감을 느낄 기회가 없었다. 시험을 잘 못보면 동생들은 ‘다음에 더 잘해서 잘 봐야지’ 하는데, 나는 ‘거봐 안 되네’ 라며 책을 덮었다. 그런 시간이 쌓이면서 동생들을 멀리 나아갔고, 나는 얼마 가지 못했다.
나와 사촌동생, 내 동생은 모두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다. 나는 사촌동생과, 사촌동생은 내 동생과 학교를 다니던 시기가 겹쳤다. 동네서 좀 좋은 학교로 소문이 난 곳이라 “영훈이는 전교에서 몇 등 안에 들어요”, “정민이는 이번에 몇등을 했어요”라며 말하기 좋았다. 남들에게 성과, 성적을 자랑할 때 내 이름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사람 만나길 좋아하는 할아버지는 밖에 나가서도 그랬다. “얘가 내 외손자인데 아주 좋은 학교에 다니고 있다”라거나 “얘는 내 둘째 친손녀인데 사촌오빠 따라 좋은 학교에 가서 오빠만큼 공부를 잘 한다”며 칭찬, 아니 자랑하기 바빴다. 동생들이 줄줄이 대학생이 됐을 땐 자랑이 한도를 초과했다. 할아버지와 우리가 자주 가던 한 오리고깃집에선 식당 주인 앞에서 동생들의 성적까지 읊을 지경이었다.
늘 첫번째였던 내가 첫번째를 뺏겨서일까도 싶었지만, 거기에 욕심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어서일까도 싶었지만 그것도 아니었고. 공부를 못해 좋은 학교를 가지 못한 데서 오는 자격지심일까도 싶은데, 그도 아니었다. 공부를 못해 좋은 학교를 가지 못한 건 내 책임인데, 거기서 자격지심을 느낄 성격도 아니었다.
밖에 나가 우릴 자랑거리로 내세우는 할아버지의 말과 행동이 불쾌했다. 딱 그 정도였다. 사람들이 없는 안에서, 집에서는 나를 우선으로 하다 밖에 나가기만 하면 동생들을 앞세워 자랑을 늘어놓기 바쁘던 할아버지가 모순적이라고 생각했다. 자랑이 아니면 가족에 대해 할 이야기가 없는 사람인 마냥 자랑에 자랑이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어느 새부터, 나는 그 오리고깃집에 가지 않았다. 추켜세워 말하는 할아버지 앞에 맞장구를 쳐주는 사장님, 그 옆에서 미소를 짓는 가족들 그리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은 내가 싫었다.
내가 동생들이 나온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잘했다면, 더 좋은 대학에 갔다면 할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달랐을까 상상해본다. 어쩌면 달랐을 수도 있겠다 싶을 만큼, 그 시기의 미움과 상처가 컸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순간에도 그리고 장례식 내내, 내 감정은 그대로였다. 내 기억 속 할아버지의 모순적인 모습들, 그리고 드문드문 또렷하게 남아있는 대화와 상황들까지도. 할아버지의 죽음 앞에 눈 감아줄 수 있는 건 없었다.
하지만 조문객을 맞이하던 나와 내 사촌동생 앞에 엄마의 손을 잡고 온 중학생 여자아이가. 늦은 밤 직접 인사를 드리러 가지 못한다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던, 목소리만 들어도 나이가 지긋했던 제자가. 내가 알지 못하는 할아버지의 인생을 전해주러 온 것은 아닐지. 내가 알던 할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전부가 아니었음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려 했던 나에게. 아직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세상에 머물던 할아버지가 꼭 남기고 싶었던 마지막 말이 아니었을지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