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불안함은 과연 외부로부터 온 것일까?
본격적으로 브런치 스토리에 연극 및 전시 관람 후기를 적어 내려가 보고자 한다. 사실 네이버 블로그에 몇 차례 시도했던 적이 있었지만, 내 블로그는 일어서기와 무너지기를 계속해서 반복했던 터라 브런치스토리라는 새로운 터전에다 써보고 싶었다.
비록 이 연극은 2023년도에 했던 작품이지만, 여지껏 살면서 이렇게 긴 러닝타임과 긴 러닝타임이 무색한 몰입감을 준 작품은 없었기에 꼭 적어보고 싶었다.
『이 불안한 집』은 영국의 극작가 지니 해리스의 대본을 바탕으로 성수정 번역, 김정 연출의 러닝타임이 무려 300분인 연극작품이다. 맨 처음 러닝타임 300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가 곤란스러웠던 부분인데,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한 번도 시계를 확인하지 않고 끝까지 봤던 감동이 컸던 작품이었다. 이 작품의 기초는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재해석한 것이므로, 오레스테이아를 설명해 둔 책인 김기영 교수의 “신화에서 비극으로”를 먼저 읽고 관람했다.
책 내용을 요약할 겸, 감상을 적어 내릴 겸 주절주절 쓰고자 한다. 오레스테이아는 총 3부로 1부는 「아가멤논」, 2부는 「제주(祭酒)를 바치는 여인들」, 마지막 3부 「자비로운 여인들」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이 오레스테이아의 계보를 이해해야지만 전체적인 내용 파악이 가능한데, 아이로페♡아트레우스, 아트레우스와 형제인 튀에스테스가 있다. 그런데 아이로페와 튀에스테스가 불륜관계로 되었고, 화가 난 아트레우스는 튀에스테스의 아들들을 잡아다 요리하여 튀에스테스에게 대접을 했다. 이 사실을 알게된 튀에스테스는 아트레우스의 집안을 저주한다.
아트레우스는 아가멤논, 메넬라오스라는 자식이 있었고, 튀에스테스는 아이기스투스라는 자식이 있었다.
아가멤논♡클리템네스트라, 메넬라오스♡헬레네였으나, 헬레네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와 눈이 맞아 도망가버리자 아가멤논은 주변국들과 동맹을 맺고 자신의 동생 아내인 헬레네를 찾으러 그 유명한 트로이전쟁을 일으켰다.
아가멤논은 트로이전쟁에서 승리하여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자신의 첫째 딸 이피지니아를 희생제물로 바치고, 그 사실을 알게 된 크리템네스트라는 아가멤논을 죽인다. 하지만, 클리템네스트라도 트로이 전쟁기간 중 아이기스투스와 불륜을 저지르며 정말 막장의 끝을 보이는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비극적 내용의 원통을 뚫는 한 가지 개념은 바로 ‘고통을 통한 배움’이라고 한다. 이제 원작과 연극의 비교점을 나열해보고자 한다. 다만 극의 내용을 전부 다 옮겨서 후기를 작성할 수는 없으므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1부를 위주로 하여 작성하고자 한다.
원작인 비극 ‘오레스테이아’를 무대에 올렸던 대디오뉘시아축제에서의 ‘코러스’는 행정 담당 최고관리인 아르콘의 지명하에 모든 비용을 담당했던 직분이었다. 코러스가 된 시민은 도시국가의 행사에 경비를 지원하는 것을 커다란 명예로 생각했고, 정치적 야심이 있어 제 이름을 알리기 위해 코러스를 자청하는 시민도 많았다고 한다. 축제가 열렸던 디오뉘소스 극장에는 코러스가 노래하고 춤추는 공간인 오케스트라와 등장인물이 입장하고 퇴장하는 무대건물 스케네, 관객석을 뜻하는 테아트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극에서의 코러스는 이와 다르게 도시에서 가장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부랑자들로 이루어졌으며, 부랑자 느낌답게 굉장히 자기 할 말만 하고 싶어 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런 점이 나에겐 오히려 웃기고 재미있었던 포인트였다. 원작에서 코러스의 담당은 극 중 분위기를 몰아가면서도 진지함을 담고 진행했을 터인데 말이다. 하지만 연극에서의 코러스는 유쾌하지만 신분 배경이 제공하는 어둡고도 퀴퀴한 모습을 뿜어냈다. 여담 하자면, 코러스 담당 배우분들의 발성이 정말 커서 굉장히 잘 들렸었다. 그리고 코러스 배역들을 통해 앞서 언급했던 저주받은 가문의 요약을 들을 수 있었다.
봉홧불을 지키고 있던 파수꾼은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 대한 여러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프롤로고스에 해당한다고 한다. 또한 봉화불은 이중적 의미를 내포하는데, 이는 승전 소식을 전하는 행운의 신호로 보이지만, 아가멤논의 죽음을 예고하는 전조이기도 하다. 이 사실을 알고난 후 나는 파수꾼을 주의깊게 보았는데 갑자기 왕비를 호위하는 병사와 러브라인이 생겨버려서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던 부분이었다.
딸이 죽었다. 그것도 두 사람의 첫 번째 사랑의 결실인 첫째 딸이 아빠의 손에 의해 말이다. 이피지니아는 마치 유령처럼 계속하여 무대에서 나타나는데 이는 끊임없이 상기되는 대상이자 일종의 트라우마, 환영이기도 하다.
딸을 재물로 바친 부분에 대한 원작 해석은 다음과 같다. 희생을 결단하는 과정에서 아가멤논은 가문의 저주를 이루려는 어떤 초월적 존재의 힘에 의해 착란 상태에 빠져서 이피지니아를 희생하려는 결정을 내려 행동하는 것으로 보이나, 고개를 숙여 강제의 굴레를 쓴다는 원작 문장에 의하면 자유의지로 선택하면서 동시에 운명에 복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연극에서는 운명에 복종해서 어쩔 수 없이 바쳤기보다는 자유의지에 의해 바친 것으로 좀 더 시선을 표했다고 생각한다.
원작에서도 나타난 전쟁동기에 대한 새로운 시각 “다른 자의 아내 때문에”라는 말은 연극에서도 나름 표현되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연극을 본 지 열흘이 지난 상태라 기억력이 완벽할 수는 없다만, 사소한 전쟁 동기로 인해 무고한 시민들의 희생과 고통이 발발했다는 것을 코러스의 입을 통하여 말해줬다고 기억한다.
이제 클리템네스트라가 전쟁에서 승리하여 돌아온 아가멤논에게 자줏빛 천을 밟고 궁전 안으로 입장할 것을 아가멤논에게 요구한다. 책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클리템네스트라의 이러한 요구는 기원전 5세기 남성 중심의 가부장 사회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정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대문의 출입은 마땅히 가장이 관리할 일인데 오히려 클리템네스트라가 아가멤논의 입장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장면은 남성과 여성의 성 역할이 전도되었음을 암시하는 부분이다.
자줏빛 천의 소도구는 굉장히 흥미로운 소재인데, 먼저 이 자줏빛 천을 밟고 궁전 안으로 입장하는 것은 천을 걷어차는 행동과 마찬가지로 밟는 행동 또한 불경한 행위를 상징하며, 결국 아가멤논이 자줏빛 천을 밟는 행위가 불경한 행위임을 암시한다. 크리템네스트라는 아가멤논에게 휘브리스를 재구성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휘브리스란, 고전 그리스 윤리·종교 사상에서 질서 있는 세계 속에서 인간의 행동을 규제하고 있는 한계를 불손하게 무시하는 자만 또는 교만을 일컫는 말이다. 휘브리스를 범하게 됨에 따라 결국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만들어준 셈인 것이다.
자줏빛 천은 중의적 의미를 내포하며 작품의 주제와도 연동이 된다고 한다. 이 천은 옷의 이미지와도 겹치게 되는데, 그것은 아가멤논이 이피지니아를 희생제물로 바칠 때 감싼 옷과 같으며, 이피지니아가 옷에 휘감겨 도살되었듯 아가멤논은 복수의 여신들이 짠 옷에 휘감겨 도살되는 것이다. 또 자줏빛 천은 사냥 그물의 이미지와도 겹친다. 아가멤논이 자줏빛 천을 밝는다는 것은 크리템네스트라가 쳐놓은 그물에 걸려들었음을 의미하고, 따라서 아가멤논은 그물에 걸려 포획되어 죽게 되는 사냥감인 것이다. 또한 자줏빛 천의 색깔은 피를 연상시키는데, 피의 파도는 아가멤논 왕가의 피비린내 나는 과거를 떠올리게 하며, 이비지니아의 희생으로 인한 피와 수많은 트로이인들이 학살되어 흘리는 피도 넘쳐남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아가멤논의 운명은 절제하는 자에서 휘브리스를 저지르는 자로, 승리한 정복자에서 아내의 손에 죽는 패배자로, 희생제물을 바친 자에게서 희생제물로 뒤바뀐다. 결국 길고 길었던 전쟁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정복과정에서 휘브리스를 저질렀기 때문에 정복한 자와 정복당한 자의 운명은 똑같다는 것이 가장 강렬한 느낌으로 다가온 부분이었다.
클리템네스트라가 아가멤논을 죽일 때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내 손으로 내가 드디어 해냈고 죽였다는 대사를 극 중 한 것 같다. 물론 원작에서도 아가멤논을 죽인다는 사실이 전도된 성 역할이나, 이 대사를 통해 그 당시 노예와 여자는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던 문화 속에서 (비록 인간의 벼랑 끝을 보여주는 부분이지만) 온전한 주체로서의 행동을 실행했다는 부분이 여지없이 나타났다고 본다. 특히 무대 장치에서 돌무덤과도 같이 생긴 거대한 돌을 밟고 올라가 그 정상에 서서 외치는 대사는 속이 후련한 느낌을 주었다.
책에서의 기억할만한 내용 중 하나로는 바로 전통 신화가 비극으로 변용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점이 인간 행위가 비극적 사건의 중심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인간 행위의 원인과 결과가 연쇄적으로 이어지며 아가멤논의 죽음으로 마무리되는데, 아가멤논의 죽음은 또 하나의 원인이 되어 또 다른 결과를 낳을 것이다. 물로 초월적 신이나 악령의 개입으로 인간 행위가 영향을 받지만 인간들은 자발적으로 행위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다는 것이다. 행위와 책임의 비극성. 이것이야말로 비극의 기본 정의가 아닐까 싶다.
2부에서는 아버지의 죽음을 복수하려는 아들 오레스테스와 막내딸 엘렉트라가 나오는데, 원작에서는 오레스테스가 아버지 대신 정의를 구현하고자 어머니를 살해한다. 어머니를 죽인 오레스테스는 복수의 여신들에게 심문을 당하는데, 이때 아폴론과 아테나가 중재를 하기 이르렀다. 아폴론의 말에 의하면 크리템네스트라가 왕이자 원정군의 총수이며 자시 남편을 살해했고 따라서 오레스테스의 이러한 살인행위는 정당하며 아버지는 잉태시킨 자이지만, 어머니는 단지 양육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원작이 만들어졌던 시기의 가부장적인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원작과는 달리 연극에서 어머니를 죽이는 주체는 다름 아닌 막내딸 엘렉트라이다. 대를 이어 내려져오는 저주를 끊을 사람은 성별의 유무를 떠나 상대적으로 고통을 더 느끼는 사람이라는 것. 그렇다. 이제는 기원전부터 내려오던 가부장제의 관습에서 탈피하여 성별을 떠나 모든 사람이 주체적으로 행동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3부에서는 어머니를 죽이고 매일 밤 환영에 시달리는 엘렉트라와 정신과 의사 오드리, 그리고 정신병원 사람들이 나온다. 여기서 극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결국 트라우마, 정신적 고통은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것이며, 그런 상처와 함께 더불어 살아간다는 그런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냥 안고 사는 것이다. 억지로 떼어낸다고 해서 떼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것으로 인해 매일매일 고통받고 사는 것은 결국 지옥이나 다름없기에 그저 안고 살아가고, 삶의 일부분이 되는 것이다. 또 다른 나만의 해석으로는 신을 만들어낸 것도 인간이고, 트라우마나 상처를 유발하거나 그런 것을 겪은 존재도 인간이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일부분이라고 해석할 법도 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신앙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은 지양해야 되는 것이 맞겠지만 다른 시선으로 보았을 때는 인간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만들어낸 것이며 결국 허구에 불과하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고 본다.
300분 동안 쉴 새 없이 연기를 한 배우들과 연출, 그 뒤에 있는 스태프 및 관계자분들, 이런 무대를 함께 한 관객들 모두 대단하게 느껴졌다. 앞으로도 이런 작품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공부할 거리가 많은 연극은 참 흥미롭고 재미있다. 두고두고 기억할 수 있는 작품을 좋은 기회를 통해 볼 수 있었음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