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말봉의 역사적 가치에 대한 재발견
미의 기준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듯 우리는 종종 어떤 가치에 대하여 그 시대에 인정받지 못했던 것이 그 이후에는 더 빛나보이는 것들을 보게 된다. 개인적으로 역사라는 것은 이러한 기준으로 인해 왜곡되는 면이 없지 않아 있거니와, 사실 옛 것을 알아보았자 지금 당장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나에겐 큰 울림이 없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학창 시절에는 역사 공부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물론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미숙한 부분이 남아있기도 하고.
좋은 기회로 2025 서울연극창작센터 개관페스티벌 작품 중 하나인 <통속 소설이 머 어때서?!> 연극을 관람할 수 있었다. '연극 제목이 이다지도 가벼울 수가 있나' 하며 기대는 저 발 아래치에 두고 관극을 했는데, 그래서 그랬던 걸까. 생각보다 너무나도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연극은 가벼운 내용보다는 평소에 접하기 어려운 주제를 다루며 내용은 직관적이기보다는 모호함에 둘러싸인 것인데, 이 연극은 가볍고도 굉장히 직관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한마디로 내 취향과 전혀 다른 연극이었던 것이다.
연극의 시작은 악기세션의 음악으로부터 시작된다. 보컬 하시는 분이 노래를 너무 잘해서 몰입하기 정말 좋았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1930년대 즈음의 유행가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연주했는데, 내가 원곡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편곡과 연주의 조화가 완벽했다라는 것만은 잘 알겠다.
그러고 나서 두 명의 해설자가 등장한다. 이 연극의 전체적인 내용은 작가 김말봉의 대표적 소설들의 내용과 이 소설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달하는 일종의 교육적 역할로서의 연극이었다.
이 해설자들의 역할은 한국 근대 연극사에서 중요한 역할이었던 만담과 변사를 변형시킨 것이었다. 이런 점을 미루어보았을 때 김말봉 작가가 활동했던 시기의 핵심 요소를 끌어다 쓴 점도 굉장히 좋게 보였다.
김말봉 작가의 <고행>, <찔레꽃>, <화려한 지옥>에 대한 내용을 소개하며 김말복의 목소리를 적절히 내비쳐준다. 재미있던 점은 분명 저 작품들은 1930년대에서 40년대 중후반에 나온 것인데 요즘 시대에서 나오는 드라마 내용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래서 역사는 유구히 반복된다는 것일까. 웃기다고도 표현하고 싶은 건 그때의 여성, 남성과 지금의 여성, 남성은 별반 차이가 없다.
<고행>에서 나오는 불륜 내용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세상은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데, 인간의 부족한 점들은 꾸준히 동일하게 존재한다.
<찔레꽃>의 경우 여성의 우정과 얽히고설킨 등장인물들과의 관계도는 김말봉작가가 얼마나 세심한 사람인지 느낄 수 있었다. 요즘 드라마와 거의 다를 게 없다고 느껴질 정도. 또한 재미있는 점은 여성의 우정을 강조했다는 것인데, 보통 여성의 우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강조하는 작품은 지금까지도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시대를 얼마나 앞서나간 작품인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작가들은 대게 남성작가들이 주류이기에 여성의 우정을 강조한 작품들이 세상에 많이 드러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짐작컨대 자기만의 삶을 살겠노라고 남성은 필요 없다고 말하는 등장인물로부터 많은 여성들이 큰 자극을 받았을 것이다. 지금이야 여성들도 경제활동을 할 수 있으니 결혼이 선택이지만, 김말봉작가 시대에서 여성은 결혼을 하지 못한다면 사람구실을 할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김말봉작가가 생각하는 여성으로서 주체적으로 사는 삶의 모습을 소설 속에 펼쳐놓았을 때 많은 사람들이 큰 대리만족을 느꼈을 것이다.
<화려한 지옥>은 제목부터가 참 요즘시대에 비견될 만한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공창제 폐지를 적극적으로 앞서서 활동했던 김말봉작가가 이 소설에 녹여낸 내용들은 작가가 비단 글로만 이 세상을 알리는 것이 아닌 행동을 바탕으로 좀 더 나은 세상을 살고자 하는 바람이 담겨져 있는 게 아닐까. 작가가 그 시대에 참으로 진정한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느껴졌다.
나는 지금 사뭇 진지한 어투로 관람평을 작성하지만, 실제 연극은 이렇게까지 무겁지 않았다. 관객들이 굉장히 잘 이해할 수 있는 내용들로 구성되었고, 웃음 포인트도 곳곳에 있었으며 그냥 마음 놓고 웃으시라는 해설자들의 말도 유쾌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 연극에 대해서 좀 더 찾아보니 2025년에 초연을 한 것은 아니고 이미 2023년도부터 여러 상을 받아 온 작품이었다. 그래. 이런 연극이야말로 상 받을 만 하지.
시작과 끝을 담당한 음악 구성원들은 '더 튠'이라는 그룹으로 퓨전국악그룹이었다. 어쩐지 보컬의 표현이 국악 느낌으로 많이 난다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나는 내가 성악을 전공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국악을 했을런지도 모른다. 태평소 소리만 들으면 괜히 눈물이 나거든.
처음 방문했던 서울연극창작센터 건물은 연극 관람만 하느라고 전 층을 둘러보지는 못했다. 아마 건물 안에 극장이 몇 개 더 있다고 들었는데. 6층에 옥상정원이라고 쓰여있던데. 날씨가 좀 더 풀리면 옥상정원도 얼른 구경해야겠다.
이건 전체적인 글 내용과는 별개의 이야기이지만, 예전에는 연극을 보면 나도 저 무대에 서서 표현하고 싶고,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싶다는 욕심이 어느 정도 있었다. 그런데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이런 게 늙었다는 건가 싶을 정도로 이제는 그런 욕심조차 들지 않는다. 퍼포머의 삶을 그토록 바라던 나는 언제부터인지 청중의 역할을 곧 잘 수행해나가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나도 무대에 다시 설 수 있겠지.
커튼콜을 끝으로 관객에게 인사하는 배우분들은 박수갈채를 받을만한 마땅한 분들이시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