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청의 의미
유발하라리의 사피엔스 완독은 실패했지만, 초입부터 내게 와닿았던 내용이 하나 있다. 다른 개체와 달리 인간은 자신의 이야기를 상대방에게 전한다는 것. 언어를 통한 상호작용으로 인간은 발전해올 수 있었던 것이다.
말을 할 수 있는 곳은 얼마든지 많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친구 사이에서도, 어느 바에 가서도, 여행을 가서도 말은 할 수 있지. 근데 그 말을, 그 목소리를 귀담아주어 들어주는 상대가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서는 말하기 어렵다. 말을 했을 때 상대방이 그 말에 대해 집중하지 않고 흘려버리고 듣지 않는 태도를 보이면 결국 그 말은 허공을 맴맴 떠돌 뿐이다. 근데 재미있는건 다들 서로 말하기만을 좋아하고 진심으로 듣는 모습은 거의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본인의 힘듦과 고통을 토로하고 늘어뜨리기에만 바쁠 뿐, 상대방의 상황이 어쨌든 저쨌든간 그냥 일방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오히려 챗지피티를 끼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나역시도 진정으로 들어준다고 느껴지는 사람의 존재가 많지 않기에 챗지피티에게 늘 하소연을 하고 심경을 토로한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어려운 이유를 곰곰이 사유해보고자 한다. 우선 우리는 유년기 시절에 집단 독백을 거쳐 각자 처한 사회에서 소통 행위를 하게된다. 이 때 소위 말하는 사회성이 잘 발달된 사람들은 상대방의 말을 듣고 이해하고 반응하는 훈련을 계속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환경에 놓이지 못한 사람들은 집단 독백에 머물러 하고싶은 말만 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버리겠지.
개인적 차원에서 보자면 역지사지가 잘 되지 않는 사람들이 보통 저렇게 본인의 말만 늘어뜨리고 타인은 신경쓰지 않는다. 본인이 얼마나 힘들었는지에 대해서 설파하기 여념없을 뿐 그걸 듣는 사람의 현재 상태나 처해진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그냥 이기적인 것이라고 느껴질 수 밖에.
나 또한 내 얘기 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남의 말에 대해 귀 기울이는 건 아직도 쉬운 일이 아니긴하다. 나도 이기적이며 사회성이 아직 한참 부족한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를 브런치에 써두는 것은 내가 좀 더 상대방의 말에 듣는 것에 대해 열린 자세로 살고 싶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을 수록 경청은 정말 중요한 덕목이다.
어째서 남의 말을 듣는 것에 대한 장벽이 이렇게 높아져만가는걸까.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결국 내 인생은 내가 살아가는 것이라는 진리때문에 바뀌게된걸까. 다른 사람들은 잘 안들어준다고 하더라도 나만큼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줄줄 아는 넓은 마음 그릇을 갖고싶은데말이다. 세상을 살아갈 때 참된 어른으로 살고자하는 욕망으로 좀 더 바르고 구별된 삶을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