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힘들다면 향을 뿜고 있음을

제주의 잘린 풀들

by 숨틈

나는 제주 시골의 전원주택에 살고 있다. 자동차를 타고 높은 지대를 달리면 저 멀리 바다가 보인다. 그러다 양쪽으로 나무가 우거진 오솔길로 들어가 다소간 더 달린 후에야 집에 도착할 수 있다.


오솔길은 차 한 대 정도만 지나다닐 수 있는 폭의 길이다. 길은 마치 다큐멘터리 영화의 필름처럼, 여러 계절과 장면을 상영해 준다. 거칠게 자란 나무들은 덩굴과 엉겨 빼곡하게 길을 감싼다. 시야를 위로 향하면, 높은 전봇대 위에는 덩굴이 축 늘어져 자라 있고, 그 위에는 참새 여러 마리가 앉아있다. 푸른 하늘 위 가로세로로 뻗어있는 구름, 거기에 비행운까지 가로지르면. 좀처럼 흔치 않은 한 컷의 장면이 되어 멍하니 보게 된다.


새들은 길 위로도 놀러 내려오는데, 참새, 까치. 꿩도 자주 보인다. 꿩은 차가 오면 급히 큰 몸을 날려 귤나무 사이로 숨기도 하고, 서너 마리씩 짝을 지어서 놀기도 한다. 또 길을 가다 보면 왼쪽으로는 겨울을 소망하는 듯이, 하얀 눈처럼 꽃을 피운 가을의 메밀밭이 펼쳐진다. 우측으로는 정강이까지 오는 한 폭의 나지막한 돌담과 그 뒤의 귤나무들. 그리고 겨울이면 귤 향기는 덤이다.


내가 사랑하는 그 길을, 어느 날 차를 타고 들어가는 중이었다. 풀 향이 진하게 코를 때려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어떤 분이 제초기로 풀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잘려 잔잔한 풀들이 힘없이 공중을 날았다. 그냥 걸어 다닐 때는 잔잔하던 풀 내음들이, 잘려 나가며 차의 환풍구를 뚫고 향을 터트려댔다. 풀 향을 좋아하는 나로서, 나의 코가 향기에 취해 기뻐했다. 하지만 내 눈으로 들어오는 화면은 돌아가는 칼날에 베여 여기저기로 날리는 고통의 모습. 묘하게 슬프지만 편안하고, 안타깝지만 납득이 되는 향이었다.


풀들이 베일 때 내뿜는 향은 일종의 ‘위기 신호’라고 했다.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유일한 무기로 향을 택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식물들의 절박함은, 인간에게 안정을 주는 향으로 둔갑한다. 식물의 상처가 내뿜는 것들이 어떻게 내게 좋게 다가오는지, 신의 묘한 장난에 기분이 이상해진다.


풀뿐만이 아니다. 나는 과거에 임상심리사로 수년 일했다. 마음에 상처를 입고 온 이들을 심리검사를 통해 확인하고, 다른 치료자에게 알려주는 일을 한다. 베인 풀의 형태를 하고 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상처받은 이들의 표정은, 절대로 하나의 얼굴로 설명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다가온 슬픔에 속절없이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분에 차서 누구든 쳐내버릴 듯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나의 슬픔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웃어 보이기도 하고. 많은 생채기에도 한 번도 아픈 적 없었던 사람처럼 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향만은 비슷했다. 그 향을 절대 잊을 수 없다. 더 이상 움직일 곳이 없는 이의 향. 분명 도움이 필요한 향. 아픔을 없애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라며 내뿜던 갈급한 향.


베어진 풀의 형태를 한 번도 겪지 않은, 겪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나 또한 그런 적이 있다. 수련을 받을 때였다. 어려운 업무에 비해 아무것도 해낼 수 없었던 그런 시절이었다. 반복되는 자괴감에, 무력감에, 내 몸을 창가로 던지고 싶은 마음이 반복해서 들 때. 그러니까…. 나라는 존재를 지구에서 뽑아버리고 싶을 때. 문제가 있음을 깨닫고 도움을 청하러 상담실을 갔다.


상담을 받는 것은 생각보다 괴로웠다. 매주 재활 운동을 하는 것처럼, 마음을 회복하는 운동을 하는 것 같았다. 상담실에서 교수님은 물어보셨다. “옛날에도 이런 기분 느꼈던 적이 있나요?” 나는 과거로 빨려 들어갔다. 언제나 문제는 표면에 있지 않다. 잠시 해가 비치지 않더라도, 뿌리가 튼튼하다면 버틸 수 있었겠지. 아버지와 어머니의 호통 속에서, 나에 대한 불신 속에서, 확실하지 않은 애정 속에서. 난 이미 부족하고 부족했다. 마르지 않는 눈물로 상담실의 책상 위에 구겨진 하얀 휴지가 여기저기 널브러지고, 심력과 체력을 모두 쓰고서야 상담실을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절대 회복하지 못할 것처럼 눈물을 쏟던 나는, 약 반년 정도 상담을 받은 후엔 더 두꺼운 뿌리로, 줄기로. 같은 나이면서도 새로운 나로 신선한 빛을 냈다.


사실 나를 잘라낸 것은 나 자신이었다. 온전한 나를, 나는 베어내고 싶어 안달이었다. 처음인 나를, 실수하는 나를. 못난 나를 잘라냈다. 보기 싫은 걸 다듬으면 더 괜찮은 내가 되리라 생각했다. 다행히도, 나를 베어내다 못해 뽑아버리기 전에 향을 뿜어냈다. 뽑힌 풀은 어찌할 수 없지만, 베인 풀은 향이 난다. 그 향은 슬프지만, 희망이 보인다. 내가 병원에서 본 그들도 그랬다. 마음속에 안고 온 슬픔, 불안, 분노, 좌절, 공허…. 전부 향이 난다. 나를 알아봐 달라는 아우성이자 자신을 치유하려는 몸부림들. 그 눈을 보면 마음이 저려 함께 슬프지만, 이상하게도 아름답다. 보이지 않는 부드러운 손을 잡아주고 싶다.


향이 나는 사람을 유독 좋아한다. 베임을 알고, 회복하려는 희망을 가진 사람들. 그런 날것의 향들은 뜨거운 사랑이 피어오르게 한다. 한 생명이 태어나 부서진 나를 힘써 일으켜보는 것. 자기 삶에 대해 고민하고 치열하게 맞닥뜨려 보는 것. 내 속에 있는 위기와 불쾌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려는 움직임. 모든 순간이 아름답다. 자신의 심리검사 결과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드디어 새로운 길이 보인다는 듯이 감사한 눈빛을 받았던 경험들. 그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풀 향이 내 머리를 가득 메운다.


모든 이가 알았으면 좋겠다. 내가 아프다면, 그것은 죽지 않은 것.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이미 치유의 향을 내고 있다. 아픔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았다면, 더 단단해질 기회를 가진 것이다. 신은 장난을 치는 것이 아니라, 기회를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을이다. 제주는 여전히 수시로 풀을 벤다. 도로 옆, 병원 앞, 공원의 작은 나무들이나 옆집 마당도 풀을 벤다. 풀은 또 베이고 회복한다. 나의 회복을, 많은 이들의 회복을 떠올리며 제주의 이름다운 자연을 바라본다. 풍경 속에서, 뽑히지 않음에 감사하고, 도움을 청하는 많은 마음들에 감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