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제주가 잘 맞나 봐

아니, 이게 회복이 되네

by 숨틈


10년이 넘게 심리학을 공부해 오면서, 나름대로 많은 회복을 해왔다고 생각했다. 트라우마틱한 일을 겪은 성인 초기부터, 집에 잘 들어가지 않던 반항적인 청소년기. 우울한 아동기와 슬프고 둔마 되어있던 영아기. 심지어 엄마 뱃속에서 지냈던 태아기까지! 생각해 보면 쉼 없이 나를 돌아보고 보살피고 치료하고를 반복했던 것 같다. 마음이 많이 아팠지만, 고통 속을 헤집는 건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어느샌가 마음은 흉터가 있어도 웬만한 일에는 쓰러지지 않을 정도로 튼튼해져 있었다.


제주에 오기로 한 것도, 그냥 현생이 지루해서라고 생각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아기 보고 밥 먹고 아기 보고 밥 먹고 잠자는 인생. 풍경이라도 바꾸어보자 싶어 훌쩍 떠나왔다.


숨통이나 트일까 해서 온 제주였다. 초반엔 즐겁지만 낯설고 불안정하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계속 살 수 있을까? 라며 간간이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다 반년이 흐르고, 최근 새삼 느꼈다.


‘나.. 너무 많이 바뀌었는데?‘


가장 많이 바뀐 것은 ‘하루‘가 행복해졌다는 거다. 재미있게도 나는 행복이 과거의 상처를 치유해야 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부분은 맞는 말일 수 있다. 아픈 과거는 저 깊은 하수구에서 수시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 내 삶에 구린내를 풍기곤 했으니. 하지만 하루의 행복에는 오랫동안 관심이 없었다.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며 챌린지하던 ‘루틴‘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주어진 하루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제주의 단독주택에서 산다는 것은, 그것을 너무 자연스럽게 하게 만들었다.


아파트는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했던 걸로 기억한다. 주택은 여름엔 더워서 헥헥, 겨울엔 추워서 오들오들이다. 참.. 너무 당연한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파트 생활에선 간간이 느끼는 날씨에도 더울 땐 어떻게 더위를 피할지 생각했고, 겨울엔 어떻게 추위로부터 보호할지만 고민했다. 그러다 보니 매일이 어떤 불쾌로부터 나를 지키는 싸움이었다.


제주에 와선 좀 다르다. 피하고 싶어도 한계가 있으니 어떻게 즐길지 고민하게 된다. 여름이면 바다 갈 생각, 수박을 한 통 사서 화채 해 먹을 생각, 마당에서 물놀이할 생각, 비가 오면 비 맞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겨울이 되니 등유난로 냄새 맡을 생각, 귤 구워 먹을 생각, 1100 고지 가서 썰매 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면 대부분의 풍경은 자연이다. 자동으로 1초 명상에 들어간다. 코로 공기 냄새 한 번 맡아주고, 숨 뱉으며 풀 흔들림에 집중한다. 집 앞에는 간간이 제비들이 3-4마리씩 모여 집 근처를 빙빙 도는데 그걸 영상으로 어떻게 한 번 찍어볼까 고민한다. 구름은 매일매일 모양이 달라서 멍하니 올려다보며 ‘어떻게 저렇게 생겼지?’라고 생각하며 명상과 유사한 효과를 낸다.


이전엔 사람들과 만나서 아파트 이야기, 아이들 교육 이야기, 남편 일 이야기하고 있으면 이상하게 기가 쭉쭉 빨려 사람들을 잘 만나지 않았다. 나는 외지인이 많은 동네에서 사는데, 온통 자신의 발로 각자의 이유를 가지고 제주에 온 사람들이 많다. 그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각자가 좋아하는 자연, 음악, 미술, 동물, 생각, 느낌들을 공유한다. 머리가 청명하다. 나는 여기에서 처음으로 내가 외향인은 아닌지 깊이 고민했다.


제주에 와서 하루를, 매일을 회복했다. 작은 고민이 생겨 마음에 찬바람이 불어도 자연이, 맑은 생각들이 나를 버티게 해 준다. 마치 제주의 방풍림들처럼.


일기 쓰는 루틴을 만들었다. 온통 감사의 내용이 내 다이어리를 채운다. 감사가 나의 몸을 휘감는다. 매일 과거의 구덩이만 쳐다보며 살던 나는, 이제 앞을 보고 하루를 보고 현재를 본다.


제주라서, 제주의 자연이라서. 그리고 제주의 사람들, 제주의 순간들이라서 가능함을 느낀다.


내 하루가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행복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