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는

망할, 장기기억 같으니라고.

by 김오마

그날은 아파서 눈이 떠졌다. 식은땀에 축축해진 이불이 무겁다. 나도 모르게 끙끙 거리는 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내가 엄마를 불렀던가? '나 학교 못 갈 것 같아.'라고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처맞았다. 새벽부터 학교 가기 싫다고 지랄한다면서 아빠가 때렸다. 하하. 귀도 밝아.


(진짜 뜬금없이 떠오르는 이런 기억들은 왜 잘 잊히지도 않는 걸까. 이젠 많이 잊고 산다 했는데 기어코 떠올라버리는 기억들이, 우습다.)


어찌어찌 씻고 학교를 가는데 아빠가 뒤에서 쫓아오는 게 느껴졌다. 내가 다닌 중학교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그 짧은 사이에 내가 도망이라도 갈 거라는 생각을 한 걸까? 애초에 내가 도망칠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는데. 온몸에 감도는 열감에 정신은 몽롱하고 비척거리긴 했지만 쓰러질 정도는 아닌 게 자못 원망스러웠다. 내가 쓰러지기라도 했으면 진짜 아픈 게 맞다고 조금은 걱정했을까? 아니면, 쑈 한다고 경멸했을까?


학교 앞 문방구를 지나고 있는데 아빠가 2천 원을 줬다. 미안하다는 말 같은 건 없었다. 2천 원이라는 금액의 기준은 뭘까? 아빠는 주머니에서 꺼낸 돈뭉치에서 2천 원을 세어 줬다. 만 원, 오천 원 짜리도 있었다. 내가 맞은 값이라면 아무리 적어도 만 원은 넘게 받아야 할 것 같은데. 2천 원이라니. 근데, 나는 준다고 그 돈을 받았다.

눈앞이 아득해지고 한없이 비참해진다. 이제와 웃긴 건 맞고 나서 돈을 받은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후론 돈 안 주더라. 꽤 쏠쏠했을 텐데.


교실에 도착하자마자 책상에 엎어지고 누군가 내 이마를 짚었던 것 같다.

그날 나는, 열에 들떠 현실 감각을 잃은 채 하루 종일 양호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어차피 집에 연락해 봤자 나를 돌봐줄 수 있는 보호자는 없었다. 관짝 같은 내 방엔 침대가 없었으니까 오히려 양호실 침대가 더 편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집에 가려면 일어나야 하는데, 온몸에 힘이 빠져서 겨우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다. 침대 머리맡에서 양호 선생님이 날 내려다보며 한마디 했다.


"니가 지금 이렇게 아픈 거, 나랑 상담 끝까지 안 해서 그래."


그 여자는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저렇게 말했다. 그 동그랗고 큰 눈이 징그러웠다.


-

학기 초, 담임 선생님과의 면담에서 나는 처음으로 어른에게 내 가정환경에 대해 털어놓게 되었다.

담임 선생님은 양호 선생님과 상담을 받아볼 것을 권했다. 양호 선생님은 상담 전문가로서 날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양호 선생님은 내가 상담받으면서 눈물을 보인 날에는 항상 빙산의 일각 얘기를 꺼내면서 '니가 오늘은 진짜 얘기를 하는구나.'라며 만족하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울지 않은 날의 반응은 영 뜨뜻미지근했다.

울지 않고 하는 얘기는 진짜가 아니란 말인가? 진짜 얘기라는 건 무슨 기준이지? 상담이라는 건 원래 매번 할 때마다 울어야 되는 건가? 매번 이렇게 진이 빠지고 힘들어야 되는 건가? 등받이도 없는 둥글고 작은 의자에 앉은 나는 어리둥절했다.


(아, 좀 거북하다.)


언제 한 번은 얘기를 하다가 내가 의식하지 못하고 귀를 만지작 거린 적이 있었는데 '너는 긴장이 풀어지면 귀를 만지고 산만해지는구나.'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내가 되게 잘못한 것 같아 귀가 화끈거리고 수치스러웠다. 나는 양호 선생님과의 상담을 받으면 받을수록 불편하고 혼란스러워졌다. 나한테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았다. 결국 그만두게 되었는데, 담임 선생님은 그동안 상담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 인사로 캔음료와 감사 편지를 써서 드리라고 했다. 하기 싫었는데, 했다.

저 말을 들었을 때, 내가 쓴 편지 내용이 떠올랐다.


'그동안 상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도 감사하지 않다.

기분이 참 엿 같았다.


-

시간이 이렇게나 많이 지났는데 이딴 쓸모도 없는 기억과 감정들은 어쩜 이토록 끈질기게 남아 아직도, 아직도 날 이렇게 만든다. 불현듯 떠올라버린 이 기억 때문에 나는 며칠 동안 쫌 괴로웠다. 이미 지나가버린, 이젠 그저 기억일 뿐인 그것들은 너무 미련하고, 지질하고, 지겹다. 아직도 과거에 붙들려 현실에 온전히 발을 딛지 못하는 어정쩡한 내가 밉다. 깊일 모를 깊고 검은 호수에 빠진 나는 허우적 거린다.

나는 수영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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