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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미정 Dec 16. 2016

우리 메느릴시더

 시어머니와의 특별한 하루


안 보이는 모습에서 참된 모습을 찾다.


어머니는 화법이 특이하다, 적어도 나한테는. 좋으면 좋다고 싫으면 싫다고 표현하는 게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던 내가 어머니의 말씀을 알아듣기까지는 20년이 걸렸다. 

그날도 그랬다. 즐겨 다니신다던 오대산을 가자 그러면 매번 사양하시던 어머니가 웬일로 선뜻 가시겠단다. 아뿔싸! 이번에도 당연히 안 간다 하실 줄 알았는데 계산착오다. 허리가 안 좋아서 걷는 게 불편하신 분이 무슨 마음으로 간다 그러시지? 아니, 그것보다 내가 왜 같이 가자 그랬지? 내가 먼저 가자 해 놓고 막상 가신다니 깜깜하다. 

나는 오대산 보궁이 좋다. 두 시간이라는, 서울에서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가 좋고 월정사를 거쳐 상원사에서 올라가는,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 고불고불 울퉁불퉁한 산길이 좋다. 보궁 앞 기도 접수처에서 늘 차와 떡을 주시며 “아~, 왔어요? 오랜만이네.”라고 인사해 주시는 그 보살님이 좋다. 그분은 누구에게나 하시는 말씀이겠지만 나에게는 절에서 유일하게 듣는 정감 돋는 인사다. 그리고 무엇보다 법당에 금박 부처님이 계시지 않아서 좋다. 금박 부처님이 안 계시니 정말로 부처님이 온 세상에 다 계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보궁은 대부분 혼자 간다. 법당 바깥에 좌복을 깔고 한참을 앉았다 온다. 그런데 내가 왜 같이 가자 그랬지? 그것도 단 둘이!

날이 꽤 춥다. 장갑과 신발에 넣을 휴대용 핫 팩을 보시더니 필요 없는 걸 “왜” 굳이 챙기냐고 타박이시다. 역시... 무표정해지는 내 얼굴을 느끼며 말없이 가방을 챙겨 든다. 

늘 그렇다. 장을 봐 오면 “아무도 안 먹는 걸 왜 사냐.", 식사를 준비하면 “아무도 안 먹는 걸 왜 만드냐.", 뭐든 다 “왜, 왜...”다. 그래서 나는 “왜”라는 말이 엄청 불편하다. 특히 그 말이 물어볼 데 안 물어보고 안 물어볼 데 물어볼 때에는. 


오대산으로 향하는 내내 돌아가신 아버님에 대한 질타가 쏟아진다. 좋은 말은 하나도 없다. 격하기까지 하다. 저런 심정으로 어째 50년이 넘게 사셨을까. 화살을 피하려면 일단 맞장구를 쳐 드려야 할 것 같은데 위험한 맞장구다. 고인을 편들자니 눈앞의 화를 피할 수 없고 어머니 역성을 들자니 고인에게 죄송하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영혼 없는 대답, “네, 네, 그러셨구나... 힘드셨겠어요...” 

상원사를 지나 주차를 하고 산을 오른다. 나더러 먼저 올라가라 신다. 어머니도 혼자 가고 싶으신 건가? 내가 불편해서? 몇 걸음 오르다 돌아보니 휘청휘청 영 말이 아니다. 혼자 오르실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옆에서 보니 손을 아예 붙들고 걸어야겠다. 그런데도 자꾸 먼저 가라 신다. 그것도 완고하기까지 하다. 드디어 짜증이 난다. 나도 모르게 버럭 하는데 심지어 말도 반 토막이다.  

“아, 이래 가지고 어떻게 혼자 간다 그래! 고만 좀 하시지!” 

내가 미쳤나 보다. 정적...... 숨 막힌다. 폭풍의 눈이다. 

한참 있다 말문을 여신다. 

“내가 몸이 무거워 니 힘들쟤?” 

이리 다정하실 수가... 결혼 20년 만에 처음 보는 반응이다. 내가 오히려 당황스럽다. 

“무겁긴요, 업고 가는 것도 아닌데.”

붙들고 가는 손이 장갑을 끼셨는데도 냉기가 느껴진다. 무뚝뚝하게 아무 말 없이 가지고 온 핫 팩을 양쪽 장갑이랑 신발에 넣어드린다. 집에서의 그 “왜”가 아직도 둥둥 떠다닌다. 음.. 오늘은 내가 좀 격했지... 

중대 사자암을 지나 조금 가다 보니 스님들 두 분이 쌩~ 하니 가신다. 가다 사진도 찍고 길 옆의 돌에 앉아 물도 마시고 하다 보니 아까 그분들이 다시 휭~ 하니 내려오신다. 날아갔다 오시나 보다. 그중 한 분이 우렁차게,

“할매, 거 딸이오, 손녀딸이오?” 하고 물으신다. 

우리 말고 또 올라가는 이가 있나 하고 뒤를 돌아보는데 어머니가 그 스님보다 더 큰 목소리로,


“딸도 아이고, 손녀딸도 아이고, 우리 메느릴시더!”


갑자기 뭔가 쿵! 한다. 쿵! 하면서 녹는다. 

어머니와는 결혼 20년 내내 불편했지만 아버님 돌아가신 후 같이 살면서는 더욱 그랬다. 미국서도 한국서도 같이 산 시간이 적지 않건만 이번엔 장난 아니다. 냉장고를 보고도 버럭, 집구석 구석 보는 것마다 버럭, 새벽마다 자는 방에 들어와 꼭 한 말씀씩 남기고 가신다. 잠귀 밝은 나는 그게 또 다 들린다. 예전에도 늘 그래 오셨지만 여전히 적응 안 된다. 아니, 적응, 내 계획에 없다. 마주치지 않는 게 상책인데 나가 있으면 집에 안 들어온다고 버럭, 집에 있으면 일 못 한다고 버럭, 나의 존재 자체가 그분에게는 버럭이다. 내가 살림하는 손이 맵질 않으니 보기 답답하시겠지. 더구나 배우자 사망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스트레스 중 제일 크다니까 어머니도 지금 제정신이 아니실 게다. 말없는 고 3 큰아이가 안쓰러워도 할 수 없다. 

그랬던 어머니가 “우리 메느리!” 하신다. 순간, 영화에서처럼 매트릭스가 좌악 펼쳐진다. 그래, 어머닌 외로우셨구나. 외롭다는 얘기를 그렇게 아프게 하신 거였구나. 외롭다는 걸 인정하기 싫으셨던 거였구나. 아니면 두려우셨을까...

어머님의 손을 꼭 잡고...


“제상이 비상이다.” 다르게 말하면,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사람이나 사물의 이면을 보고 그 일이 일어나게 된 상황을 이해하게 되면 사실 화낼 것이 없어진다. 그에 따라 다툼도 일어나지 않게 된다. 

수없이 들어온 말이고 수없이 해 왔던 말이다. 송광사 인월암 스님께 맨 처음 여쭤본 것도 이 구절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나름 안다고 생각했다. 내 딴에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도 조금 더 본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내 안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철저하게. ‘나’를 통해 어머니를 보면서도 그걸 ‘내가 살림을 잘 못하니 답답해서 저러시겠지...’ 혹은 ‘배우자 사망이 제일 힘든다니까...’ 등 ‘착한 척’으로 포장해 온 것이다. 교묘한 거짓이다. 그래서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의 외로움이, 그녀의 절규가. 



人我山崩處에 無爲道自成하니 

凡有下心者는 萬福이 自歸依니라.

나 잘난 생각이 사라진 곳에

무위도는 저절로 이루어지니

마음을 낮추어 사는 자에게

온갖 복이 저절로 굴러 오느니라. 

-초발심자경문 / 자경문, 야운비구   


40분이 아닌 5시간에 걸친 그날의 순례는 참 많은 걸 바꾸어 놓았다.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는 다시 고인의 이야기를 꺼내신다. 격하긴 하지만 아까보다는 덜하다. 

“어머니, 그동안 참 잘 사셨어요. 아버님도 어머니한테 미안하단 말을 그렇게 거칠고 투박하게 하신 걸 거예요. 어머니 아니고는 아버님 맞춰줄 사람 아무도 없었을 거예요. 고생하셨어요.” 

그리고 어머니의, 고인에 대한 투정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거짓말처럼...

그날 이후로도 나는 여전히 바쁘다. 집에 있는 시간은 더 줄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가끔 아침에 20분 정도 어머니랑 차 한 잔 하고 나면 어머니가 권하시는 대로 철 이른 파카를 입고 나오기도 하고 먹지도 않는 빵, 떡을 하루 종일 가득 들고 다니기도 한다.



어떤 모습 있다 하여 찾는다면 모두 거짓

형상 없어 못 본다면 이것 또한 삿된 소견

당당하고 깊은 고요 어찌 틈이 있을 건가

한 줄기로 뻗는 섬광 온 허공이 환해지네.


- 야부 스님 금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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