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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미정 Mar 12. 2019

예술을 위한 예술, 그 야누스적 이면


“안녕하세요? OOO입니다.”
 “무슨 일을 하시나요?”
 “네, 저는 음악을 합니다.”
 “오, 그러세요? 멋지시네요!”
그리고 정적이 흐른다.
“......”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주고받는 인사 중 한 장면이다. 왜 멋지다는 거지? 여기서 항상 걸린다. ‘멋지다’는 표현도 불편하고 뒤따르는 정적은 더욱 불편하다. 선생님이나 회계사 등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눌 때에는 멋지다 운운은 없다. 물론 그에 따른 정적도 없다. 초면이니 물어보지도 못한다. 내가 너무 까칠한 건가?
어느 정도 친해진 지인 하나가 얘기 중에,
“자기는 멋져. 예술하쟎아!”
기회가 왔다.
“뭐가 멋져요, 언니?”
 “예술하니까 현실하고 상관없이 자기 하고 싶은 거 하쟎아.”
아하, 그거였구나. 정신이 번쩍 든다. 다른 분야는 모른다. 음악만 생각해 보자. 음악인도 밥은 먹어야 산다. 음악인도 사회인이다. 음악인들간의 사회도 사회겠지만 지금 21세기 한국사회의 일원이기도 하다. 몇 백 년 된 다른 나라의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인 듯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결코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밥은 먹어야 산다. 오히려 몇 백 년 전 유럽과 현대 한국사회라는, 시공간을 훌쩍 초월한 레퍼토리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보편적인 공감대를 끌어내려면 누구보다도 현실적이어야지만 가능하다. 누구보다도 인간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이 땅에서 시작한 국악도 별반 다르지 않다. 서양화되고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는 국악도 이미 충분히 이질적이다. 그렇다. 어떻게 보면 지금 우리가 하는 음악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멋진 표제 하에. 예술을 위한 예술? 뭐, 가능할 수도 있다, 음악이 취미라면. 

우리가 지금 주로 하고 있는 ‘옛날’ 음악들은 그 옛날에는 결코 옛날 음악이 아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살아 있는’ 음악이었다. 사람들이 연주하고 향유하면서 오랜 시간 검증에 검증을 거쳐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음악이다. 지금 우리는 우리 시대의 ‘살아 있는’ 음악을 얼마나 하고 있을까? 오랜 시간 검증을 거쳐 후대에까지 물려 줄 음악이 얼마나 될까? 
이게 지금 나의, 그리고 한국음악인의 현실이다. 한동안 잠가 두었던 생각들이 폭발하듯 밀려온다. 나에게 음악은 결코 취미가 아니다. 생계다. 그러나 슬프게도 연주로는 내 생계를 도저히 해결하지 못한다. 가장 일차적으로는 내 연주가 출중하지 못해서이지만 약간 다른 각도에서 보면 나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한국에서 작품으로, 혹은 연주로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은 백 년 역사에서 음대를 졸업하고 수 십 년 기량을 갈고 닦아 온 수 천 수 만 명 전문음악인 중 두 손으로 약간 모자라는 정도다. 이것이 핵심이다. 뭔가가 잘못되었다. 한참 잘못되었다. 
이 뼈아픈 현실을 놓고 한번 깊숙이 들여다보자. 한국사회에서 클래식 음악은 백여 년 전 이식된 문화로 시작했다. 한국 사회의 뿌리에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종교적 상황과 묘하게 맞물려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클래식이 자리 잡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자리 잡는다’는 것은 국민의 감성적 정서와 경제적 정서를 함께 이야기한다. 감성적으로는 클래식 음악을 존중하고 공감하는 부분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백 년 전에는 이질적인 문화로 시작했지만 21세기 한국사회에서 클래식 음악은 더 이상 결코 이질적이지 않다. 클래식 음악의 장점과 교육적 역할에 대해 충분히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술적으로 지적으로 능력 있는 많은 사람들이 클래식 음악계에 포진해 있기도 하다. 정말 중요한 자산 중 하나다. 
그러나 이것이 경제적 정서로까지는 연결되지 않고 있다.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게 바로 여기서 유발된다. 유료관객도 후원도 확보하기 힘든 것이 한국음악계의 현실이다. 유료관객은 외국 연주자들이나 몇몇 세계적 연주자들에게 집중되고 후원은 학계에서도 정부에서도 그리고 기업에서도 구하기 힘들다. 오히려 각 대학에서는 취업률을 내세워 음대, 구조조정 1순위라는 칼바람이 불고 있다. 취업률이 대학을 평가하는 지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음악이 어떤 인류보편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음악이 한국 사회에 왜 필요한지, 그래서 왜! 음대가 없어지면 안 되는지, 지금 우리, 한국의 음악인들이 학계를, 정부를, 그리고 기업을 설득해 낼 수 있어야 한다. 한국 사회가 이 소중한 가치를 모른다고 탓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음악인들 스스로가 음악을 지키기 위해 뛰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을 정확하게 진단해야 한다. 아플 것이다. 민망하고 부끄럽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음악계의 현실은 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발전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도래하는 것들이고 우리가 그동안 간과하고 있던 것들이 곪은 것이다. 처음부터 다시 점검해야 할 때가 왔다. 그러면 앞으로의 방향도 자연스럽게 도출될 것이다. 오히려 지금의 위기가 한국의 음악문화를 탄탄하게 다질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아니, 그렇게 되어야 한다. 

음악은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 천 년 동안 어느 지역, 어느 나라에서든 없었던 적이 없었다. 어쩌면 음악이 인간의 본성에 내재되어 있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음악의 본질과 가치는 감히 사람의 언변으로는 표현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은 개개의 음악에 빠짐없이 표현되어 있다. 그 음악의 가치가 무엇인지, 음악이 한국 사회에 어떤 점에서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 음악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런 문제들을 함께 고민해 보고자 이 칼럼을 시작한다. 음악의 본질적 가치,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살아있는 음악활동, 경쟁과열상태의 현대 한국사회에서 음악의 역할, 그리고 미래의 한국음악계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게 될 음악교육 등 다양한 방면에서 살펴볼 것이다. 
항상 한국음악계의 발전을 고민하고 그 길을 모색하고자 소중한 논의의 장을 제공해 주시는 월간 리뷰에 무한한 감사의 뜻을 전한다.            


2017년 3월, 월간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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