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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름, 아이들은 어떻게 기억할까?

제주 아빠의 좌충우돌 여름휴가 이야기 (1)

by 제주 아빠


올해 초등학교 입학한 둘째 아이가 첫 방학을 맞이했다. 덩달아 홈스쿨링 중인 첫째 아이도 같이 방학을 보내고자 학업을 잠시 멈췄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학교에서 일하는 아내 역시 모처럼의 휴식을 얻을 수 있었고 상관의 배려 덕분에 아빠 역시 휴가를 얻어 온 가족이 함께 여름을 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생겼다. 눈 깜짝할 새 지나가는 짧은 휴가가 아닌 제대로 놀 수 있는 긴 휴가를 얻은 우리 모두는 7월부터 신이 나있었고 7월 휴가 때는 워밍업 수준으로 여름휴가를 준비하였다. 의외로 표가 매진이 잘되는 양양-제주편 항공기 예매를 일찌감치 했기 때문에 밥솥에 밥이 든든할 때 엄마의 마음처럼 안심이 되었다. 넉넉한 마음으로 7월엔 수영장을 설치했고 패들보드를 구매해서 연습해봤다. 잠시 맛보기 휴가를 즐긴 후 본격적인 여름휴가 계획을 짰다. 분초를 쪼개어 평상시 하고 싶던 것들을 차근차근 계획했다. 엄마와 아빠가 하고 싶은 것부터 아이들이 하고 싶은 것까지 빠짐없이 계획에 반영했다. 꽉꽉 채워진 계획을 보며 흐뭇했다. 모두가 기대하는 여름휴가. 날씨만 도와주면 된다.


설레는 마음에 휴가 전날 좀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벽에 설악산 대청봉을 올랐다가 비행기를 타고 갈까 하였지만 너무 무리하면 휴가를 제대로 즐기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에 다음으로 양보했다. 사실 그보다는 과원들과 하계 휴양을 산으로 가자고 제안하였지만 거절당한 것도 한몫했다. 과원의 대다수가 MZ세대인지라 산은 별로 안 좋아하는지...(아니면 내가 싫을 수도 있고 ^^) 그런 것으로 맘 상해하는 속 좁은 사람은 아닌지라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산행을 취소했다. 돌아보면 첫날부터 빽빽한 일정을 소화하며 안 가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휴가철을 맞이한 강원도의 7번 국도는 예상치 못한 교통체증이 발생하여 최근 몇 번 비행기를 놓질 뻔했기에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으로 늦은 새벽 공항에 차를 대고 차에서 한숨 푹 잤다. 양양공항의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무료 주차라는 것. 새벽녘에 잠을 깨니 해를 마주하고 있는 양양공항 인터라 건물 너머 보랏빛의 아침놀이 떠오르고 있었다. '10일간의 휴가가 시작되었다.'


20220806_050141.jpg 건물 뒤로 아침해가 떠오르는 양양공항의 모습. 건물 너머가 동해다. 긴 활주로와 동해안이 수평하게 나있는 활주로를 달려 이륙하는 기장의 기분은 어떨까. 칵핏에 들어가 보고 싶다.


비행 스케줄 때문이기도 할 테고 강원도 영동 지방의 거점공항인지라 남북에서 모이는 탑승객을 기다리기 위함이기도 할 테지만 양양-제주 항공편은 첫 비행기가 너무 느리다. 9시 5분인데 새벽부터 이미 오신 탑승객이 많았다. 7시 비행기면 참 좋겠다 싶었다. 피곤함이 채 가시지 않아 공항 노숙자 마냥 여기저기 편한 의자를 찾아 널브러졌다. 수속이 끝나고 보안검색대를 지나니 이미 해는 한참 떠올라 있었다. 내가 타고 갈 보잉 737-800 플라이 강원 항공기 날개엔 청, 백, 적의 선명한 로고가 햇빛에 비춰 매끈하게 빛나고 있었다. 안정감 있는 보잉 737-800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항공기인 만큼 신뢰도 높고 모양새도 잘 빠졌다. 좌석을 배정받을 때 주로 비상구석을 배정해준다. 운이 좋은 건지 직업 덕분인지 알 수 없으나 덕분에 좁은 이코노미석에서도 다리를 쭉 뻗고 갈 수 있어 매번 편안한 비행을 한다. 시간대에 따라 창가와 복도석을 다르게 선호하지만 아침 비행엔 역시 창가가 좋다. 힘차게 날아오른 비행기가 태백산맥 상공을 지날 때쯤엔 마음속에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가 절로 읊어진다. 최근 양양-제주 노선의 비행로가 바뀌었다. 서울 상공 부근을 지나 90도로 꺾어 남쪽으로 내려갔었는데 요즘엔 제주까지 대각선으로 가로지른다. 덕분에 비행시간도 많이 줄었다. 국내선 중 가장 긴 노선을 자랑하는 양양-제주 노선이지만 가는 동안엔 태백산맥, 대청호 등 한반도의 아름다운 자연을 마음껏 누릴 수 있어 지루한 노선은 아니다. 다만, 착륙한 이후엔 10시 20분에 제주공항에서 출발하는 표선행 122번 버스를 탈 수 없다.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것은 10시 50분 출발하는 111번 성산항 버스다.


20220806_102440.jpg 푸른 하늘, 뭉게구름과 함께 나를 맞이해주는 제주공항. 나는 착륙하고 에어부산은 육지로 이륙한다. 한 개의 활주로에 번갈아가며 이륙과 착륙으로 바쁜 공항이다


성산항 버스는 봉개, 대천동, 송당을 지나기 때문에 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 하지만 성산일출봉 부근에서 내릴 수 있어 내림과 동시에 관광을 시작한다는 점에서 관광객에게는 좋을지 모르겠다. 수고스럽게도 아내는 나를 위해 하천리에서 성산읍까지 차를 몰고 나와준다. 언제나처럼 눈부신 하늘과 뭉게뭉게 솜사탕 구름의 여름 날씨 앞으로 웅장한 성산일출봉이 위엄을 드러내고 있다. 주차장 맞은편 '연돈 볼카츠' 앞에 아내가 서있다. 2주 만에 보는 아내인데도 여전히 설레고 반갑고 좋다. 모처럼 볼카츠를 구매해보려고 한다며 맛있을 것 같다고 재잘댄다. 그런 아내를 보면 귀엽기 그지없다. 그렇게 시작한 나의 휴가 첫 일정은 ESTJ인 아내님께서 정해주신 코스로 차를 몰고 가는 것이다. 성산읍에서 종달리로 넘어가야 하는데 하늘이 정말 맑아 드라이브가 즐겁다. 육지에서 가장 나를 불편하게 했던 것이 교통체증인데 제주도에서는 그런 게 없어 운전이 즐겁기만 하다. 제주도에 내려오고 나서는 버벌진트의 '완벽한 날'을 듣지 않는다. 가사에 나오는 '차가 좀 막힌다고 짜증 안 나, 왜냐하면 나의 곁엔 바로 이럴 때를 대비해서 어제 사놓은 양고기 샌드위치'가 공감이 되질 않아서다. 핑계 같지만 내가 살이 찐 이유는 육지에서 차를 몰 때마다 양고기 샌드위치는 아니지만 맥도널드 햄버거를 항상 먹었다. 그래야만 교통체증의 짜증을 견딜 수 있었어. 제주도에선 그럴 일이 없다. 드라이브가 즐겁다. 게다가 아내와 나는 차를 탄 이후부터 끊임없이 수다를 떤다. 주제도 다양하다. 날씨 이야기, 아이들 이야기, 제주도 이웃 이야기, 오늘 일정 이야기... 그렇게 차를 달려 허기진 내 배를 채워줄 제주에서의 첫 음식은 '산도롱 맨도롱'


20220806_130007.jpg 산도롱 맨도롱의 홍갈비 국수. 마라탕 느낌의 마한 국물과 짭조름한 갈비의 맛이 일품이다. 너무 맵지 않아 훌훌 잘 넘어간다. 육전과의 조화도 최고다.


아내가 일하는 신산리에 있던 '산도롱 맨도롱'은 손님이 많아져서인지 이곳 종달리로 옮겼다. 무심한듯한 인테리어가 아기자기한 종달리와 어울리진 않지만 맛으로 승부하는 가게인지라 그러려니 한다. 최근 먹는 양이 많이 줄어들어서 1인 1그릇은 어려울 듯 해 홍갈비 국수와 육전을 주문한다. 맵찔이인 내가 11년 간 맵잘알 아내와 살다 보니 홍갈비 국수 정도는 맛있게 먹을 정도가 되었다. 내 손으로 빨간 국물을 주문하면서 부부는 닮아간다는 것을 느낀다. 그릇 가득 담긴 국수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줄어든 갈비의 개수에 물가가 많이 오르긴 했구나라는 씁쓸함도 느낀다. 사실 그래서인지 줄 서 먹어야 하는 이곳에 점심시간임에도 줄 서지 않고 바로 먹을 수 있었다. 가게 문을 나오니 종달리 바다가 아름답게 빛난다. 제주 바다는 늘 그렇듯 하늘을 닮아있다. 투명한 바다 아래 하얗고 고운 모래와 강한 고기압의 영향으로 푸르다 못해 눈부신 하늘빛을 반사해 코발트그린으로 빛난다. 휴가의 여유를 한껏 만끽하며 덥지만 기분 좋게 가게 문을 나선다. 하지만 다 먹고 나니 아주 조금 아쉽게 느껴졌다. 그래도 걱정 없다. 엣티제 아내님은 다음 코스까지 준비해두었기 때문이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꼬스뗀뇨'로 향한다.


아내는 참으로 잘도 맛집을 찾아낸다. 나는 알 수 없지만 아내만의 기준이 분명히 있어서 그냥 단순히 인스타그램에서 찾아낸 맛집을 링크 걸어주면 거절당하기 일쑤다. 거절당해도 기분 나쁘지 않다. 지금까지 11년 연애기간 동안 '써니픽'이 실패한 적은 없다. 오늘의 써니픽 역시 대성공이다. 꼬스뗀뇨는 건축물부터가 마음에 들었다. 노출 콘크리트 공법에 시원시원한 천장이 매력적이었다. 안도 다다오의 영향으로 노출 콘크리트 공법이 우리나라에서 한창 인기인 것 같다. 여기는 과감하게 테이블 수를 줄이고 층을 나누지 않고 천장을 시원하게 뚫어버린 데다가 바 앞의 공간 역시 과감한 조형 공간으로 만들어버렸다. 대단한 용기다. 하지만 덕분에 손님들에겐 최적의 사용자 경험을 제공해줄 수 있게 되었다. 꼬스뗀뇨 라떼 역시 풍미 있는 거품이 일품이었다. 나는 아내의 전속 사진사이기도 하다. 좋은 배경이 있다면 연신 셔터를 눌러댄다. 그런 아내는 나의 사진을 좋아해 준다. 참으로 잘 맞는 궁합이다. 이러니 11년 동안 연애하며 살 수 있는 거다. 그런 면에서 이곳 카페는 실내와 실외, 루프탑까지 모든 공간이 사진 찍기에도 참 좋은 공간이었다. 젊은 사람들의 소위 인스타 갬성이라는 곳이 충만한 곳이었는데 안타까운 것은 가족단위로 온 손님들이 딱 봐도 부모님은 자녀들 손에 끌려왔고 자녀들은 그나마 사진 찍으며 재밌어하지만 모두가 여행지에서도 스마트폰을 손에 놓지 않고 대화 없는 적막이 흐른다는 것.


20220806_133313.jpg 공간이 아무리 넓다 하더라도 실내에 이런 조형물을 가져다 놓을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무심하게 놓인 현무암이지만 이 덕에 이 카페가 더 마음에 들었다.


더 놀고 싶었지만 일찍 길을 나섰다. 이번 휴가는 정말 운이 좋게도 육아휴직 때 알게 된 정민 형님 가족들과의 2년 만의 재회를 할 수 있게 됐다. 정민 형님을 제주에 완전히 정착한 우리 집에 초대할 수 있게 돼서 기쁜 마음으로 손님 맞을 준비를 부지런히 했다. 정말 좋아하고 존경하는 정민 형님네 가족은 멋진 삶을 살고 있다. 다만, 제주에 정착하고픈 꿈을 간직한 채 아직 실행에 옮기지 않고 신중한 태도를 보이신다. 나는 아직 어려서인지 조금은 저돌적이게 그 선택을 했는데 나의 선택이 형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도 되었다. 더불어 형님 같은 분을 이웃으로 둘 수 있다면 정말 이런 행운도 없을 것이다. 집을 사서 살아간다는 것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요소 중 하나를 꼽자면 이웃이다. 운이 좋게도 제주에 내려온 이후 좋은 이웃을 많이 만났기 때문에 우리의 삶 역시 이렇게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좋은 이웃을 만난다는 것. 이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어찌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런 면에서 정민 형님은 이웃으로 꼭 모시고 싶은 분이기에 이번 회동이 참으로 기대가 되었다. 수영장 물부터 바비큐 준비, 테이블 준비, 루프탑 준비까지 꼼꼼하게 마치고 드디어 형님네 가족과 2년 만의 재회를 했다.


수염이 더 희끗해진 형님은 더 멋져졌다. 수염이 참 멋지게 나는 분이다. 나는 수염이 잘 안 나서 그런지 저런 수염을 가진 분들이 참 남자답고 멋지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오래간만에 봤는데도 나를 기억하고 반겨준다. 오래간만에 만난 기쁨도 잠시 아이들은 고민할 것도 없이 수영장으로 뛰어든다. 동네 꼬맹이들이 모두 수영장에 들어가면 비좁을 법도 한데 그 안에서도 나름의 질서가 존재한다. 잘들 논다. 가끔 울고 소리 지르는 아이들도 있지만 부모가 특별히 개입하지 않는다면 나름 그 평정을 다시 찾아간다. 아이들도 다 나름의 생각이 있다. 제주도에 온 이유 중에서 하지마 하지 않는 부모가 되기 위해서도 있었는데 확실히 도시보다는 하지마란 말을 많이 줄였다. 덕분에 아이들 역시 그 안에서 자신들의 질서와 사회를 구성해나가는 경험을 한다. 수영장에서 하지 말아야 할 규칙을 스스로 정해서 지키도록 서로에게 강조해준다. 늦은 밤까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물가가 많이 올랐지만 우리에겐 식자재 마트에서 할인 행사를 하고 있는 흑돼지 앞다리살이 있으니 고기는 풍부하다. 앞다리살이 얼마나 맛있는지 사람들은 잘 모른다. 덕분에 나는 신난다. 이렇게 맛있는 앞다리살을 100g당 천 원 꼴의 싼 가격에 마음껏 먹을 수 있으니. 뱃속에 들어가는 음식만큼이나 많은 말이 오간다. 제주에서의 삶을 꿈꾸고 그 안에서 이웃과의 소중한 경험을 기대한다. 자녀들의 성장에 무엇이 중요한 가치인지 반문해본다.


20220806_230857.jpg 너무 신나게 놀아 노는 와중의 사진은 찍지 못했다. 투명한 물이 뿌예진 것은 그만큼 신나게 놀았다는 증거. 집 앞 수영장에서 노는 기분이란...


본격적인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학원도 쉬고, 방과후도 없다. 매일 24시간을 온 가족이 온전히 함께 보낼 수 있는 일주일이 주어졌다. 시작이 참 좋다. 내가 휴가를 나가면 자연하우스는 떠들썩해진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몸이 부서져라 놀 계획이다. 재충전이 아니라 방전의 시간이 되어도 좋다. 아이들에게 이 여름은 어떻게 기억될까. 아이들은 마음껏 뛰어놀고 행복을 경험하며 성장한다. 심리학자 에릭슨은 인간의 발달 단계에서 반대되는 경험이 서로를 보완하여 성장시킨다고 했다. 이 여름은 그동안 느꼈던 결핍을 충족시키는 기회가 될 것이다. 아빠 없는 시간 동안 목가적이고 소소한 즐거움의 제주를 맛봐왔다면, 이제는 본격 좌충우돌 미치도록 신나는 제주의 다이내믹함을 즐기게 될 것이다. 아빠이기에 해줄 수 있는 놀이들. 평상시 떨어져 지내는 아빠로서 한편으로는 아빠의 소중함을 기억해주길 바란다. 아빠의 사심이 가득 들어간 이 여름을 신명 나게 즐길 준비. 오늘 하루를 보내보니 우리 가족 모두 준비가 되어 있다. 이렇게 제주에서의 첫날이 저물어 간다. 이웃 모두가 떠난 후 조용한 적막이 남은 맑은물어진별스테이 머리 위로 총총 별이 빛난다. 한바탕 왁자지껄 떠들고 난 후라 더욱 나직하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이웃이 있고, 맛있는 음식과 드넓은 자연 가운데 있는 삶. 본능적으로 인간은 이런 삶을 꿈꾸게 마련이다. 그런 삶을 지금 보내고 있음에 감사하다.


20220806_144424.jpg 아내의 예쁜 모습을 사진에 담아내는 것이 중요한 남편의 역할 중 하나다. 푸른 바다와 곧게 잘 뻗은 워싱톤 야자가 조화를 이루는 이곳은 제주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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