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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물 Aug 09. 2021

「오늘」(오왠 O.WHEN)

주절주절 음악 01

「오늘」(오왠 O.WHEN) : https://youtu.be/_AWDWdtaqKY

기꺼이 청해 듣고 싶은 푸념


푸념과 하소연. 둘의 차이를 생각해본다. 푸념은 뱉는 것이고 하소연은 청하는 것이다. 듣는 사람이 있든 없든, 또 듣는 사람이 그에 대해 공감하든 말든 간에 일단 뱉고 보는 것이 푸념이다. 반면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나의 이야기를 듣고 기구함에 공감해주길 청하는 것이 하소연이다. 그렇기에 하소연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지만, 어떤 말보다 타율적이게도 느껴진다.


「오늘」은 절로 듣고 싶은 푸념같은 노래였다. 호소하지도 매달리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아니 그래서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되는. 그러다가 나만 왜 이렇게 힘든 건가요, 하는 가사로 나만 힘들어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이내 종장에는 술집 뒷 자리 사람의 흥미진진한 썰을 훔쳐 듣는 심정이 되어서, 거, 그것 좀 더 해봐요, 라며 부끄럼도 무릅쓰고 기웃거리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간혹 날숨처럼 우울을 입에 담을 때가 있다. 우울해, 피곤해, 짜증나. 의식도 못 하는 새 찾아와 나를 힘들게 하는 이 감정들은 이렇다 할 연유도 사연도 없기에 더욱 성가시기만 하다. 「오늘」에서 나를 괴롭히는 것이 오늘 밤인 것처럼, 힘들다는 것은 항상 그런 것 같다. 무엇때문인지도 모르게, 때로는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우리는 살아내기가 힘에 부친다고 느낀다. 힘들다는 생각은 수렁 같아서 한 번 힘들다고 느끼면 그 감정에서 빠져나오기도 쉽지 않다. 힘들다고 생각하고 있는 자체가 힘들다. 힘들다는 생각에 잠을 못 자 힘들다. 몸이 힘들고 마음이 힘드니 평소에 좋아하던 것들도, 그냥 무색 무취 무미로 느껴져서 더욱 힘들다.


그러나 묘한 것은 힘들다는 감정은 관성을 쉬이 이기지 못해서, 힘들면 힘든 채로 살아진다는 것이다. 직장인들이 짜증과 욕지거리를 가슴 속에 품고도 매일매일 출근을 하는 것처럼. 본격적으로 힘들어 하던 밤과 새벽이 지나면 우리는 우리의 의무로, 책임으로 돌아간다. 힘든 채로. 그래서 나는 몇몇 베스트셀러에서 말하는 힘들지 않아도 된다, 힘들어 하지 마라는 류의 공감과 위로를 가장한 조언들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정말 힘들 때 찾게 되는 것은 차라리 다른 사람의 푸념이다. 나만 힘든 게 아니라는 사실. 다들 힘든 채로 살아가고 있구나. 정말 나를 보듬어주는 것은 이러한 감각들이다.




오늘밤이 왜 오늘의 나를 괴롭히죠


계절 학기를 마치고 나니 노는 시간이 참 많아졌다. 아무런 예정이나 의무도 할당되어 있지 않은 자유시간이. 그래서 요 사이엔 한 때 즐겨 하다가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게임을 다시 시작했는데, 플레이 타임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쌓여가는 것이 게임을 켤 때마다 눈에 밟혀서 슬슬 마음이 편치 않다. 게임 속 나의 농장이 번성해갈수록 나의 현생이 퇴보해가는 듯한 기분. 무엇보다 그 게임은 날짜와 시간 개념이 있는 게임인데, 게임 속의 시간이 흐른 만큼 현실에서의 시간도 착실하게 녹아내려버린 풍경이 자괴감을 불러일으킬 때가 많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나는 가만히 있는 걸 참 어려워하는 성정이다. 아무 일정 없이 집에 박혀 쉬는 것도 길어야 하루지, 너무 오랜 시간 무료하게 있다보면 되레 기가 빨려 버린다. 쉬는 날에도 종일 집에만 있질 못 하고 산책 삼아 마트에 가서 물건 구경을 하다가 온다든지, 집에 있는 커피 머신을 외면하고 굳이 집 앞 카페에서 커피라도 한 잔 사 마시고 오는 식이다. 무료하기 때문보다도 일종의 강박이다. 무용하게 하루를 보내는 것에 대한 죄책감, 생산성 없는 하루에 대한 두려움. 그를 피하기 위해 나는 강박적으로 일을 만들어낸다. 딱히 더 생산적이랄 것도 없지만, 적어도 자기 전 '오늘 뭐 했지?'라는 물음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일들. 


생산적인 일을 하는 나, 생산적인 취미를 가진 나, 생산적으로 쉬는 나의 모습을 갈구하는 것. 그를 통해 나라는 사람의 존재 가치를 끊임없이 입증하고자 하는 이 강박은 습관적인 자기 혐오에서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의 일환이다. 한껏 자기 혐오를 쏟아낸 뒤 '그래도 오늘은 뭐라도 했으니까.'라며, 씻지도 않은 상처에 연고부터 바르듯. 이것이 나를 좀 더 성실한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겠지만, 때때로 이 강박은 나의 휴식도 나의 취미도 나의 즐거움도 아무것도 하지 않음과 다름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가득 찬 하루를 보내면서도 허탈함과 싸워야 하는 건, 생각보다 중요한 것들을 잡동사니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 처박아두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꾸역꾸역.


성실하게 사는 것이 목적이나 결과가 아니라 고작 자기 방어의 수단으로 쓰인다는 게 참 모양 빠지는 일이다. 그러나 다년간의 경험 상, 이 강박에서 결코 쉬이 벗어나지 못 하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적어도 조금씩 너그러워지려고 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나는 충분히 가치있어, 가 안 된다면 사실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닌 일은 없어…, 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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