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절주절 음악 02
「집에 돌아오는 길」(악동뮤지션) : https://www.youtube.com/watch?v=FEcfXRPaO90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온 그 남매를 보고 나는 '와, 진짜 어리다' 생각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 할머니가 전국노래자랑에 나와 인기상을 타가는 초등생을 보며 '아휴, 저 쪼꼬만 게 어쩜 저렇게…' 하는 식으로 그들을 봤던 셈이다. 나중에 그 남매가 우승하고 찾아본 프로필에는, 어, 나랑 동년배였네. 끽해야 한두 살 차이였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보여준 노래들이 대부분 발랄하고 통통 튀는 노래들이었기 때문일까, 혹은 여타 예능에 나오던 '신동'들에 그들을 빗대어 봤던 것일까. 어쩌면 나는 오만하게도 스스로가 그만큼 어리지는 않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뒤로 언제나 나는 그들의 노래를 들으며 '이 노래를 누가 싫어할 수 있지'라는 생각을 했다. 밝은 멜로디로 고된 현실의 가사를 읊던 데뷔 앨범도, 사춘기를 맞은 학생의 노래를 담은 『사춘기 上』도, 성인과 청소년의 틈바구에서 그 사춘기를 돌아보는 『사춘기 下』도, 가장 최근에 나온 앨범인 『항해』도, 그저 악동뮤지션의 앨범이기에 의심 없이 들었고 여지 없이 즐거웠다. 노래의 대중성, 음악성을 떠나 그들의 노래는 동년배의 노래였으니까. 내가 자라는 만큼 그들도 자라고 그들의 노래도 자라서 지금의 내가 갖고 있는 고민을 적확하게 짚어줬으니까.
언제고 나는 그들과 동년배일 것이다. 그리고 둘도, 언제까지일지 모르지만 나와 비슷한 시간을 공유하며 음악을 할 것이다. 그 사실에 늘 감사한다.
어릴 적 집에 돌아오는 길은 참 멀기도 했다. 다니던 학교에서 버스를 15분 정도 타고, 내려서 다시 15분 정도를 걸어서, 눈이 오면 차가 올라가지 못하는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면 집. 소와 개와 닭을 기르고, 텃밭이라기엔 큰 농지에 할머니의 입맛에 맞는 작물이 자라고, 여름이면 마당에 흙으로 한 단을 쌓아 만든 잔디밭에서 수박을 잘라먹고 겨울이면 주인 없는 무덤이 솟아있는 비탈에서 겁도 없이 사료포대로 눈썰매를 타던, 집.
생활권과 동떨어진 산장같은 집에 사는 탓에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양껏 놀지 못하는 것은 아쉬웠지만, 그것은 불편이었지 불행은 아니었다. 때로는 학교를 마치면 혼자 집에 갈 수 있다는 사실에, 금방 다른 사람과 헤어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기도 했다. 발표 중에 한 말실수로 잔뜩 놀림 받은 날도, 친하다 생각한 친구가 한 말에 한 마디 쏘아붙이지도 못 하고 펑펑 울기만 한 날도, 점심을 먹고 오니 필통 안의 내용물이 온 교실에 흩뿌려져 있던 날도, 집에 오는 길에서만큼은 혼자서 양껏 후회와 우울을 뿌려대며 돌아올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돌아오면 집이, 추억 속의 집처럼 발랄하게 아름답지는 않더라도 버젓이 서 있는 그 집이.
서울을 비롯한 여타 도시와 지근거리에 덩그러니 있던 우리 동네는 당연하다는 듯 재개발되어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부모님과 우리 형제가 먼저 근처의 아파트로 이사를 갔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기르던 가축을 줄여 연고도 없는 경상도의 소도시로 옮겨갔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이사를 가기 전 날, 잔치인지 장례인지 온 가족이 모여 푸짐한 저녁식사를 하고 난 저녁, 나는 불빛도 없는 밖에서 핸드폰 카메라로 열심히 집을 찍었다. 어렴풋한 윤곽이라도 남도록, 그러나 확실하게 집 전체의 윤곽이 사진에 들어오도록. 재개발이 끝나고 다시 그 때의 집을 찾아가본 날에는, 어디였는지도 제대로 알 수 없어 같이 간 어머니와 '여긴가?' '여기쯤일걸' 하는 문답만 주고받다가 돌아와야만 했다.
고향은 내가 태어날 때에 우연찮게 나의 부모가 자리하고 있던 곳에 불과할까, 필연으로 얽히지 않은 그것을 자라면서 잃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일까. 그렇다면 재개발로 살던 집을 떠난 그 때의 나는 어려서, 너무 어려서 아직도 고향을 그리는 것일까. 지금은 집도, 텃밭도, 축사도, 주인이 없는 줄 알았던 무덤도, 집에 돌아가는 길에 뻗어 있던 벽돌담도 찾아볼 수 없는 곳에 수백 가정이 몸을 누이고 있다. 밉거나 슬프진 않다. 기억이 풍화되어간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 짐짓 아쉬울 뿐이다.
요즘 남매가 예능을 찍는 것 같던데, 동생(이수현님)이 운전을 해서 오빠(이찬혁님)을 데리러 가는 것을 보고 새삼 충격받았다. 세월이 참 빠르단 말을 입에서 떼어 놓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