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서로를 제대로 아는걸까?
마흔의 관계 맺기
숲길로 갈 때면 어김없이 큰 사거리를 만나게 된다. 걸어오던 흐름이 끊길까 봐 제자리걸음을 하며 초록불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들썩이는 내 운동화 옆으로 민트색 구두가 기척을 내며 다가왔다.
아.. K!
이 얼마 만에 만나는 반가운 사람인가!!
K는 큰 아이가 비슷한 연배라 알게 된 사이다. 초창기 함께 어울린 적이 몇 번 있었으나 호감을 가진 선에서 더 깊이 관계를 다지지는 못했다. 내가 재취업을 했을 때 그녀는 시모의 병시중에 매진해야 했고, 내가 퇴사한 이후 그녀는 돌싱 언니와 조그만 가게를 차리느라 동분서주하였다.
아이는 기숙사가 있는 대안학교에 보냈단다. 카페를 어렵게 열었으나 개업 빨 이후 손가락을 빨았단다. 그러다 조금씩 입소문을 타고 장사가 되려던 찰나 코로나가 터져 타격이 컸다고 했다. 그래도 지금 출근하는 모양새를 보니 용케 잘 버티고 있나 보다 했더니 웃고 만다.
나의 안부도 묻는다.
태산 같은 에피소드가 떠오르는데 어디서부터 뭘 말해야 할지 멈칫했다.
그냥 그렇지 뭐 얼버무리다 그녀가 탈 버스가 곧 도착한다는 안내가 들려왔다.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고 하자 장난스레 웃는다. 가게 놀러 와서 들려달라고 명함을 주면서 마지막 멘트를 나에게 날렸다.
"이렇게 여유롭게 산책도 하고.. 좋아 보인다~"
나 여유 없어. 늙고 병들어 이렇게 기어 나온 거야. 퇴사해서 수입 빵 원에 무직이고, 남편은 언제 회사 잘릴지 몰라 근심이 커. 큰 애는 사춘기인지 시큰둥하고, 작은 애는 이제 아기 취급 말아달라 선포해서 마음 둘 곳도 없어. 아버지는 대학병원에 수시로 입원하시고, 엄마도 힘이 달려 (육아) 못 도와주셔... 나이 더 먹고 나 쓰일 곳도 없을까 봐 걱정이야. 뭐 해 먹고살지 너무 막막해서, 답답해서 나온 거야.
주절주절 새어 나오는 신세한탄을 꿀꺽 삼키고, 그녀를 태운 광역버스가 사라질 때까지 바이 바이 손을 흔들었다.
발길을 돌려 걷기 시작하는데 뭔지 모를 상실감이 계속 따라온다. 그녀가 수면 아래 빙하의 실체를 모른다고, 날 팔자 좋은 여편네로 오해하겠다 생각하니 갑자기 외로워졌다. 그녀를 알기 전보다 더 외로워졌다.
달리 생각해보면 나도 그녀를 제대로 모르긴 마찬가지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노환으로 고생인 시모를 커버해야 하는 부담감, 여린 아이를 기숙사로 보낸 엄마의 마음, 가게를 꾸리면서 했을 마음고생을 그녀 역시 간결하게 생략해 버리지 않았던가..
우린..
서로를 제대로 아는 걸까, 모르는 걸까?
들리는 것은 촤르르 나무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뿐이다.
나는 저 사람이 참 좋은데, 나도 널 알고 싶고 너도 날 잘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먹고 사는 일이 바쁜 40대의 스케줄은 염원하는만큼 관계를 다질만한 여유를 주지 않는다. 시간적 여유가 생기더라도 관계를 다지는 지난한 과정을 거칠 마음의 여유가 생길 것인가를 의심하게 만드는 우리의 나이가 다시 부각된다.
서글프지만 인정할 건 인정하고 넘어가야지. 그저 언제 만날지 알 순 없지만 만나는 그 순간 널 만나 반갑다는 나의 순도를 열심히 보여줄 수 밖에...
마음의 귀는 잠시 닫아두고 바람결이 인도하는 길로 조용히 걸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