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나는 취향의 간격이 크다. 교집합이 희박하다. 표현 강도가 부족한데.. 안 맞다. 그냥 단순하게 안 맞는다고 하자. 등산을 하더라도 사소한 것까지 천천히 음미하고자 하는 나의 문과적 감수성과 A 지점부터 B 지점까지의 최적의 경로 선택과 소요시간을 계산하여 미션 완료에 집중하는 그의 이과적 감수성이 상충하므로 안 맞는다는 게 맞는 거 같다. 그런데도 결혼하고 아이 낳고 여태 그럭저럭 살아오고 있다.
연애할 때는 다르다는 것이 신기하고 귀여웠다. 내가 초코파이의 빵 부분만 갉아먹고 마시멜로를 마다하면 이게 핵심인데 왜 버리냐며 홀짝홀짝 먹어치우는 남편이 강아지 같아 어쩔 줄 몰랐다. (그래, 원래 연애할 때는 제정신이 아니다)
결혼하고 익숙해지면서는 종종 다툼이 있긴 했다. 다행인 건 시간이 흐르며 둘 다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기에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포기할 것은 포기할 여유가 조금씩 만들어졌다. 삼겹살과 갈빗살을 다 시켜 같이 맛본다거나, 극장에 같이 가서 각자 보고 싶은 영화를 보고 나온다거나, 각자의 시야에서 신기한 걸 보면 서로에게 귀띔하는 식의 '최소한의 교집합 속에서, 따로 또 같이'를 인정했더니 어느새 정 떨어지는 전 남친, 전 여친에서 형제님, 자매님으로 승격, 평화관계를 구축하게 되었다.
우리의 교집합은 최근 중년의 똥배로 초점이 옮겨졌다. 그래서 게으름을 만끽할 일요일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애써 깨워 데리고 나왔다. 인격(똥배)을 말살하고 말리라는 거친 포부가 메인이긴 했으나 기저에 깔린 진의는 좋은 것은 함께 나누고픈 것이었다. 뜨고 지는 해를 통근버스 앞에서 확인만 하고 사무실에 앉혀지는 사노비인지라 정작 주민등록상 거주지의 소담한 매력을 모르는 슬픈 세대주의 삶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숲길 중 가장 아름다운 길을 골라 안으로 그를 데리고 들어가자 나뭇잎 사이 틈틈이 햇살이 번갈아가며 긴 빗살을 드리워 주고, 살짝 올라오는 이마의 땀은 귀밑머리를 쓸어주는 바람이 말려주었다. 풍성한 뻐꾸기 소리와 장난스러운 참새 소리가 장단처럼 흘러나오고 풀벌레는 반주를 넣듯이 나지막이 읊조리고 있었다. 쨍하니 파란 하늘과 울창한 나무, 말라가는 진흙과 굵은 모래가 어우러진 회갈빛 땅이 액자처럼 풍광을 받쳐준다. 이 안을 자박자박 걷는 사람들이 뿜는 근면한 활기도 말갛게 빛났다.
우린 서로 말이 없었지만 상대의 곁에 머무는 거리를 지켜가며 걸었다. 이 청초한 사위를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우리가 함께 가고 있었다.
숲길 아래 주택단지 골목을 돌면서는 '이런 집 짓고 돈 걱정 없이 잔디나 깎으며 살고 싶다'라는 물욕을 초긍정하기도 했다. 도시 소음 없이 조용한 터전에 대한 공감을 실어서 말이다. 분홍 꽃더미 앞에서 제라늄이냐 아니냐 묻기도 하고 빈터에 파, 가지, 감자를 심어 가꾸는 나이 든 모자의 풍요로운 모습을 한동안 담아두기도 했다.
그렇게 40여 분을 보내고 나니 볕이 슬금슬금 뜨거워졌다. 볕에 쫓기듯 자투리 같은 그늘 아래 길을 알차게 찾아내어 집으로 돌아왔다. 새집 지은 머리를 하고 품에 안기는 아이들을 안고 엄마, 아빠가 뭘 보고 왔는지 이야기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