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각의 계절], 권여선
_압도 당하다. 이 책에 대한 내 첫 느낌이다. 뭐랄까. 하드 커버로 입혀진 한 권의 책이 나를 압도했다는 느낌이 아니라, 총 271페이지를 이루고 있는 문단, 문장, 행간, 단어, 글자, 말줄임표, 쉼표, 아무튼 모든 것이 각각의 힘으로 나를 누르고 밀고 찌른 힘 하나 하나에 압도 당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표현한다면 적절한지 모르겠다.
'압도'가 한바탕 지나간 이후 나는 급격히 차분해졌다. 침착해져야만 했다. 바람에 하늘거리는 '실버들'처럼 내 머릿속에서 여러 갈래로 나뉘어 뻗어나가는 생각의 줄기를 한데 모아 차근차근 음미하고 곱씹어 소화시키고 싶었다. "실버들 천만사"라고 하지만 사실 천만 가닥의 실버들 가지도 하나의 씨앗에서 비롯된 것이니, 나 역시 생각의 근원을 찾으려 노력했다. 몇 가닥 안 되는 미미한 생각에 불과할지라도.
<사슴벌레식 문답>. 세 번 연속 읽었다. 반복해 읽을 때마다 압도 당했고, 압도 당할 것을 알면서도 압도 당했고, 압도 당하고 싶어 또 읽었다. 그러자 "뒤집힌 채 버둥거리며 빙빙 도는 구슬픈 사슴벌레"의 말대로 "어디로든 들어"온 나의 인연이 떠올랐다.
_그 친구는 여중 2학년 때 짝꿍이었다. 외모, 체형, 성격 등 여러 면에서 비슷했던 우리는 쌍둥이라 불렸다. 친하게 지냈지만 단짝은 아니었다. 당시 내 단짝은 따로 있었다. 아무튼 중3 때 다른 반이 되고, 다른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졌지만 삐삐, 휴대폰으로 가끔 안부를 주고받으며 인연의 끈을 서로 놓지 않았다. 그 덕분일까. 사회에 나간 우리는 다시 가까워졌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친구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이미 3년차이던 나와 같은 공무원이 된 것이다. 국민의 눈에 보이는 게 결코 다가 아닌 공무원 조직의 더럽고 치사한 면면과 고충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는 서로에게 터놓고 지내면서, 우리가 인연은 인연인가 보다, 라는 각별한 애정 담긴 말을 하곤 했다. 인연은 이어졌다. 우리는 한 해 차이로 결혼해 비슷한 시기에 임신했고 한 달 차이로 딸을 출산했다. 휴직과 복직 시기도 비슷했으니 당시 우리에게 대화거리는 늘 넘쳐났다 . 학창시절, 연애시절, 직장으로서의 공무원, 임신과 태교, 출산과 육아, 복직 후 전쟁 같은 일상. 이런 소재들에서 우리가 공감하지 못한 건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인연은 인연이라는 생각이 틀리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러하리라는 확신을 했던 것 같다.
'사슴벌레'는 언제, 어디로, 어떻게 들어왔을까. 이 글을 쓰기 전에 카톡에 들어가 그 친구와의 대화방을 열어보았다. 2020년 5월 30일 이후 그곳엔 나를 향한 그녀의 일방적인 메시지들만 남아 있다. 잘 지내는지, 무슨 일 있는 건 아닌가 걱정된다, 생일 축하한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 간밤 꿈에 네가 나왔다, 인기 드라마에서 흔치 않은 네 이름이 나와 생각나 보내본다. 일 년에 세네 번 정도 그렇게 메시지가 왔다. 그런데 나는 답을 하지 않는다. 아니 할 수 없다. 언젠가부터 대화를 주고받고 나면 박탈감과 상실감이 밀려왔다. 서글펐다. 2012년 한 달 차이로 여름에 태어나 비슷한 성장의 길을 걸었고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믿었던 친구의 딸과 내 딸의 행로가 느닷없이 내 딸에게 들이닥친 희귀난치병으로 인해 완전히 달라지고, 그에 따라 우리의 삶 역시 완전히 달라지게 되면서 나는 그녀를 피했다. 피하고 싶었고 피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보호하려면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같은 생각이고 언제까지 이럴지 나도 모르겠다. 어쩌면 언젠가 그 착하고 고마운 친구가 스르르 놓아버릴지도 모른다. 한때 우리가 인연은 인연인가 보다고 생각했던, 그 인연의 끈을.
_"너 어떻게 이러냐? 니가 어떻게 이래?
나 어떻게든 이래. 내가 어떻게든 이래. 이렇게 되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어떻게 미안하지가 않아?
어떻게든 미안하지가 않아.
어떻게든 미안하지가 않다는 말은 미안할 방법이 없다는, 돌이킬 도리가 없다는 말일 수도 있다. 우리가 지나온 행로 속에 존재했던 불가해한 구멍, 그 뼈아픈 결락에 대한 무지와 무력감의 표현일 수도 있다."(p.37)
"어디로 들어와?
어디로든 들어와.
어리도 들어와 이렇게 갇혔어?
어디로든 들어와 이렇게 갇혔어. 어디로든 나갈 수가 없어. 어디로든.....
갇힌 기억 속의 내 옆에 쌍둥이처럼 갇힌 지금의 내가 웅크리고 있다."(p.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