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학단편선 15, 윌리엄 트레버], 윌리엄 트레버
_"세상은 우리한테 가장 좋은 것을 허락하지 않아."
이 문장은 24페이지에 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총 614쪽 분량의 책 중 24쪽에, 총 23편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 중 첫 단편인 <욜의 추억>의 결말 부분에 있다. 과연 맞는 말이었으므로 나는 이 문장에서 잠시 서성이며 지나치듯 생각했다. 그렇지, 그래야 세상이라고 할 수 있지. 책장은 천천히 느리게 넘겨졌다. 불우한 어린 시절의 기억에 사로잡혀 부질없는 망상에 빠져버린 남자, 뒤늦게 자기기만을 깨닫고 자괴감에 빠진 여자, 거짓 사랑에 이용당하고 있는 여자, 삶의 대부분을 함께 지내온 친구를 잃은 슬픔에 잠긴 여자, 우연으로 인해 비롯된 죄책감을 평생 떨치지 못한 채 사는 남자, 요양원에 보내질까 두려워 남의 눈치를 보며 자신의 의사를 내비치지 못하는 나이 든 여자. 그리고 소외당한 채 세상의 변두리를 헤매는 외로움과 슬픔에 젖은 또 다른 사람들. 이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거침없이 휙휙 읽어 내려갈 수 있을까.
_세상으로부터 가장 좋은 것을 허락받기는커녕 가장 나쁜 것만은 피할 수 있기를 바라야 할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이야기가 자꾸만 나를 붙잡았다. 그렇게 내 왼손에 들린 책의 페이지가 점점 두꺼워지는 동안 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배배 꼬이려던 마음이 느슨해지는 듯하더니 어느샌가 스르륵 풀어지고, 달그락거리며 복작복작했던 머릿속이 잠잠해진다. 근거 없는 자아도취에 젖는 것이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모든 것은 지나가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완벽히 통찰한 지혜로운 사람, '우리한테 가장 좋은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세상임을 수용한 어질고 너그러운 사람, 어떠한 불운과 고난이 닥치더라도 견뎌낼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된 것 같다. 이런 단단한 착각에 빠져드는 경험은 낯설지 않다.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면 늘 그랬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 일만 없었다면 저는 지금 다른 사람이 됐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제 생강에 동의하시나요, 미스 그림쇼?""(p.17)
"그녀는 이 모든 것이 터무니없는 짓임을 알았지만 전에도 그런 것처럼 또다시 이런 행동을 하게 될 것임을 알았다."(p.171)
""여기서도 행복해요. 어딜 가서 사나 똑같지 않겠어요?" 브리디는 이렇게 대답했지만 아버지는 그녀가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고 있음을, 삶을 짓누르는 현실의 무게에 서러워하고 있음을 알았다."(p.176)
"그녀는 인생을 살아 보니까 모든 것에 적응이 되더라고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기까지 했다."(p.362)
"두 사람은 그들을 학대하는 것이 삼촌의 삶에 남은 마지막 즐거움인 것처럼, 돈이 그리고 돈이 약속하는 자유가 그들의 삶을 환히 밝히는 별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불 밑에서 서로에게 몸을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좀처럼 깨닫지 못한 채 삼촌의 빈정대는 작은 웃음소리를 들었다. 잠들기 전에도, 그리고 꿈속에서도."(p.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