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목가 1, 2], 필립 로스
_ "개인의 회한과 사회의 회한은 함께 흔적을 남기지만, 겪을 때에는 그것이 원래 한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해질 무렵>에서 황석영 작가가 남긴 '작가의 말' 중 일부로, 개인과 사회는 한몸이라는 뜻일 것이다.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이 사실을 자주 잊고 사는 것 같다. "연속성과 일상이라는 눈가리개"에 눈이 가려진 채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 급급한 우리는 우리가 미미하나마 시간과 공간을 차지하는 존재임을 잊는다. 시간과 공간, 다시 말해 세대와 시대, 사회와 국가, 세계와 지구라는 영역(활동, 기능, 효과, 관심 따위가 미치는 일정한 범위) 안에서 우리가 숨쉬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사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긴 하다. 사상과 이념은 뜬구름 같고 전쟁은 옛날 이야기나 다른 나라 일이다. 각종 사고와 범죄는 흔하지만 나와 내 가족은 피해갈 것이라는 이상한 믿음이 떠다니고, 발견과 발명, 탐욕과 배신, 출생과 사망, 우환과 질병, 거짓과 경솔한 언행은 밥 한끼 먹는 사이에도 수없이 일어난다. 우리에게 갖가지 파장을 몰고 오는 시간과 공간이란 것은 때론 관념적이고 때론 머나멀고 때론 대수롭지 않으며 때론 너무나 흔해빠졌기 때문에 우리는 인식조차 못하는 게 아닐까. 그러나 막상 어떤 일 -우리와 사회는 한몸이기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 -이 벌어지면 우리는 혼란에 빠진다. 누구, 무엇 때문일까. 언제, 어디서부터일까. 어떻게, 왜 이렇게 되었을까. 곱씹을수록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게 이유가 되는 것 같으면서도 그 어떤 것도 이유가 아닌 것 같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혹은 알면서도 쉽게 간과한 결과 아니면 설마설마하면서 어떤 일에 휘말리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누구나 한번쯤은 믿을 수도, 믿겨지지도, 믿고 싶지도 않은 일에 휩쓸리게 된다. 우리에게 '사회의 회한'의 흔적이 남는 것이다.
_1960년대 말 미국, 한 가족이 있다. "일을 하고. 저축을 하고. 성공. 미국에 환호하던 삼대. 국민과 하나가 되었던 삼대"에게는 유대계 이민자로서 화목한 가정과 안정적인 사업을 일구었다는 자부심과 자긍심이 있었다. 하지만 대대손손 이어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견고한 "그들 세계"는 사대 째에 이르러 "완전히 파괴"되고 만다. 직접적으로는 베트남 전쟁과 반전 시위, 민권 운동 등으로 소용돌이치는 당시 미국의 시대 상황이 원인인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작품 속 주인공이 죽는 순간까지 그러했듯 나 역시 생각을 거듭할수록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비단 "개인의 회한과 사회의 회한이 함께 흔적을 남"겨서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마땅한 이유인 동시에 그 어떤 것도 합당한 이유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삶이 이렇게 끔찍하게 깨져나갈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미국의 혼돈이라는 혜성에서 돌조각 하나가 떨어져나가 뱅글뱅글 돌면서 올드림룩에 사는 스위드에게까지 간 것이나 다름없다."(1편, p.135)
"그것도 이해 못할 일이었지만, 그와 아내 돈이 어쩌다 그 모든 것의 원천이 되었는지 그것도 정말이지 이해 못할 일이었다. 어쩌다 그들의 해로울 것 없는 결점들이 합쳐져 이런 인간이 되고 말았는지."(2편, p.15)
"사실 우리 누구도 일어난 일을 다 알지는 못하고, 사실 우리 누구도 그 이유를 다 알지 못해요. 배후에는 뭔가가 더 있어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훨씬, 훨씬 더 많아요."( 2편, p.278)
"그는 우리가 서로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거짓말 같은지, 또 우리가 실제로 서로에게서 나온다는 것이 얼마나 거짓말 같은 일인지 보았다. 출생, 승계, 세대, 역사 - 정말이지 거짓말 같았다. 그는 우리가 서로에게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 우리가 서로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것을 보았다."(2편, p.281)
_책장을 넘길 때마다 전율을 느꼈다. 인간과 인간에 속한 것들과 인간이 만들어낸 것들에 경악했고, 나와 내가 아는 모든 이들 역시 그런 인간이라는 사실에 몸서리쳤고, 인간과 사회가 한몸이라는 진리가 새삼 살갗에 와닿았다. 인간과 관계된 그 모든 것들의 "배후"를 소리없이 지나가는 불가해한 어떤 흐름들에 경외심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배후"가 엄존함을 알고도 어떻게든 살아가려 애쓰는 수많은 삶과 이야기들이 애처롭고 애틋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이 뭐가 문제인가? 도대체 레보브 가족의 삶만큼 욕먹을 것 없는 삶이 어디 있단 말인가?"(2편, p.2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