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필립 로스
_얼마전 <서울의 봄>을 관람하고 나서 당연한 수순(?)처럼 몇 편의 영화를 찾아 보았다. 그중엔 이미 본 것도 있고 처음인 것도 있었다. <1987>, <변호인>, <택시운전사>, <남산의 부장들>, <스카우트>, <화려한 휴가> 같은 영화들. 사회와 개인, 시대와 개인, 역사와 개인. 느슨하고 성긴 듯하지만 밀접하고 긴밀한 관계인, 실은 한몸인 것들이 한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념과 사상, 이데올로기, 전쟁, 인종주의, 차별과 혐오. 모두 인간이 만든 것들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강요하는"(p.158) 것들이다. 영화를 보면서 분노에 치를 떨었던 나 역시 인간이다. 자라면서 별다른 노력이나 저항 없이 관습이나 인습을 믿어온 인간이고 "이럴 때는 이런 사람, 저럴 때는 저런 사람, 또다른 데서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p.281)인간이다. 그러니 내가 만약 그 사회와 시대의 복판에 놓였었다면, 인간인 나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무슨 말을 하고 어떻게 행동했을까. 아마 그 어떤 것에도 떳떳하지 못한, 부끄러운 인간이었을 것 같다. 지금의 나와 마찬가지로.
_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인 내 발 아래로 시대와 역사, 사회 같은 거창한 것들이 소리 없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고 생각하니 뒷덜미가 선득해진다. 나를 지금의 나로 만든 것은 그동안 내가 보고 듣고 읽고 느끼고 경험한 모든 것들, 그 모든 사소한 것들이라고 생각하니 괜히 자세를 고쳐 앉게 된다. 그리고 '내가 보고 듣고 읽고 느끼고 경험한 모든 것들'은 대부분 우연과 운명의 합작품이라고 생각하니 내가 지금 여기 이 순간 숨쉬고 있는 것 자체가 새삼 놀랍고 신기하기만 하다.
_"역사의 척도가 축소되어 개인화되었고, 미국의 척도가 축소되어 개인화되었다.(...)시대의 마법이었다. 개인이 역사 속으로 흘러들어가고, 역사가 개인 속으로 흘러들어갔다."(p.72)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떻게 끝나는지, 운명이란 참 변덕스러워. 안 그런가? 론지의 수하에 들어갈 기회를 잡지 못한 건 고작해야 티끌 만한 지리적 우연 때문이었지."(p.120)
"가끔 돌이켜보면, 내 삶은 지금까지 내가 귀기울여 들어온 하나의 긴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그 수사법은 때로 독창적이고, 때로 즐겁고, 때로 허풍이고, 때로 정신나간 듯 보이고, 때로 사실 그대로이고, 때로 바늘처럼 날카로웠다. 기억이 미치는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항상 이야기를 들어왔다.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어떻게 생각하지 말아야 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어떻게 행동하지 말아야 할지, 누구를 미워하고 누구를 존경해야 할지, 무엇을 포용하고 언제 도망쳐야 할지, 무엇이 황홀하고, 무엇이 잔혹하고, 무엇이 찬양할 만하고, 무엇이 얄팍하고, 무엇이 불길하고, 무엇이 쓰레기이고, 그리고 어떻게 영혼을 순수하게 지켜야 할지에 대해(...)하지만 이유야 어떻든 내 인생의 책은 여러 사람의 목소리로 이루어졌다. 내가 어떻게 지금의 이 자리에 왔는지 스스로 묻다 보면, 놀라운 답이 나를 기다린다. 바로 '듣기'였다."(p.372)
"그것 역시 선생님에게 일어난 일이었다.(...)그 시대의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야기, 결국 그의 동생처럼 역사의 희생자가 돼버린 이야기를(...) 그게 미국이란 나라가 선생님에게 제시한 삶이었다."(p.530)
"우리의 청각은 얼마나 깊은 곳까지 도달하는가! 단지 귀에 들리는 것만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라. 귀가 있다는 것은 신과 같다는 뜻 아닌가! 어둠 속에 앉아 누군가의 말을 찬찬히 듣기만 해도 인간 존재의 가장 깊숙한 오류로 돌진해들어갈 수 있다는 건, 최소한 반쯤은 신과 같다는 뜻 아닐까?"(p.5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