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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의 노블 테라피 May 21. 2024

사라고 안 할게. 들어나 와.

[마은의 가게], 이서수

_지난 주말에 친구와 고속버스터미널 지하 상가에 갔다. 목적지가 거기는 아니었다. 그 근처에 볼일이 있었고, 오랜만에 간 김에 구경이나 해보자고 즉흥적으로 정한 거였다. 딱히 살 게 있다거나 사고 싶은 게 없었으므로 우리는 천천히 걸으며 구경했다. 옷가게가 대부분이었지만 걸음이 자주 멈춘 곳은 인테리어 소품점이었다. 어디서 물건을 구했는지 궁금할 정도로 신기하고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매장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저절로 손이 가게 되지만 눈으로만 봐달라는 문구가 적힌 푯말 때문에 눈으로만 살펴볼 수밖에 없는, 하나 사볼까 싶다가도 생각보다 비싼 가격에 곧바로 마음을 돌리게 되는, 그런 예쁜 장식품들 말이다.


이것 봐라, 저것 봐라, 어쩜 너무 예쁘다, 어디에 두면 예쁘겠다, 그렇게 맘에 들면 하나 사지 그래, 그럴까, 아니야 너무 비싸, 먼지 쌓이면 청소할 거리만 늘어나, 그건 그래. 이런 사소한 대화를 나누며 천천히 걷다가 우리 둘다 어느 옷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매장 밖에 걸린 청바지 위에 매치해놓은 셔츠가 우리의 눈길을 끈 것이다. 옅은 하늘빛 바탕에 주홍색 세로 줄무늬가 있는 셔츠였는데, 마가 섞인 재질이라 지금부터 한여름까지 입기에 맞춤인 옷이었다. 우리가 셔츠를 만지작거리며 서 있자 사장 언니가 나왔다. 사장이 아니라 점원일지도 모르고 언니가 아니라 동년배나 연하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느끼기엔 사장이고 언니 같았다. 어쨌든 화통한 성격인 듯한 그 언니가 우리를 보고 말했다.  

밖에서들 그러지 말고 들어와, 들어와.

그래도 우리가 머뭇거리자, 언니가 내 옷자락을 매장 쪽으로 이끌었다.

사라고 안 할게. 일단 들어나 와. 내가 너무 심심해서 그래. 어찌나 손님이 없는지.


"내가 너무 심심해서 그래", 이 말에 매장 안으로 발을 들였고, 언니의 얼굴을 슬쩍 보았다. 그리고 [마은의 가게]의 '마은'이 떠올랐다. "매일 아침 눈뜰 때마다 오늘도 종일 손님을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p.116)워진다는 '마은'이.


사라고 안 한다는 사장 언니는 내 앞에 셔츠를 대어주면서 말했다. 하나 사. 딱 언니 옷이네. 내가 특별히 싸게 해줄게. 생면부지의 남에게 서로가 언니라 부르는 상황이 좀 재미있다고 생각하면서 내가 물었다. 얼만데요? 별로 안 비싸. 6만 8천원. 보세옷가게인데 비싸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은근슬쩍 다른 옷으로 눈길을 돌려 구경하는 척을 했다. 그러자 사장 언니는 마 소재의 카키색 재킷을 만지작거리는 내 친구에게 다가가 말했다. 언니, 너무 잘 어울린다. 이런 건 기본 스타일이라 유행도 안 타. 하나 사. 친구가 물었다. 얼만데요? 23만원. 친구의 흔들리는 눈빛에서 친구도 비싸다고 생각한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우리는 눈빛을 주고받았고 다른 옷을 조금 보는 척 생각해보고 다시 오겠다고 말하며 조심스럽게 매장을 나섰다. 그러자 사장 언니가 대답했다. 그 화통한 목소리로. 그래, 다시 와. 다른 데서는 우리집 같은 옷 없어. 사라고 안 할테니까 다시 와.


그 후로 우리는 상가 곳곳을 구경했고, 그 언니 옷가게에서 본 똑같은 옷을 파는 곳을 네 군데 보았다. 같은 가격일지 가격표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사라고 안 한다'고 하면서 '하나 사'라고 권유하는 그 사장 언니의 화통한, 아니면 어쩔 수 없이 화통해진, 그것도 아니면 화통한 척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어른거렸다. '내가 너무 심심해서 그런다'는 언니가 '마은' 같아서 마음 한구석이 조금 아릿했다.


_그러고 보니 상가는 얼핏 보면 구별할 수 없는 비슷한 외관의 가게들로 즐비했다. 의식적으로 신경쓰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매장 입구 위에 매달려 있는, 가게 이름과 호수가 적힌 작고 네모난 팻말을 기억해두지 않으면, 다시 돌아가 사고 싶어도 그 매장이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또 그러고 보니 일렬로 빽빽이 늘어선 매장 중에는 손님 하나 없이 사장인지 직원인지 모를 한 명의 사람이 멍하니 앉아 있거나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곳들도 있었다. 또 그러고 보니 나와 친구처럼 진열품을 잠깐 만지작거리다 가는 이들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는 사장인지 직원인지 모를 사람들도 있었다. 또 그러고보니 매장을 지키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여성이었다.


_고속버스터미널 상가를 지키는 수많은 '마은'들도 '마은'처럼 "두려움과 자괴감, 이를 극복하게 하는 사랑과 연대"(p.272)를 겪어냈을까.  '그러고 보니' 하는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면 보이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고, 그때마다 손님 혹은 소비자로서의 권리만 생각했던 내가 한없이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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