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과 생각>, 정용준
_지난 겨울은 유난히 눈(雪)이 많았고 추웠다. 딸아이의 졸업식이 있었고 입학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나는 더는 움츠러들 수 없을 만큼 움츠러들었다. 곰이나 개구리의 겨울잠 같은 웅크림이 아니었다. 잔뜩 겁을 먹었고 주눅이 들었다. 인간이 지닌 상상력과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이 원망스러웠다. 무엇을 상상하고 예상하든 언제나 보란듯이 그 이상을 펼쳐 보이는 삶이 두려웠다. 희망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라고, 희망은 가장 마지막에 죽는다고 하지만 나는 자꾸만 포기하고 싶었다. 지금 여기서 모든 걸 끝낸다면 아쉬운 게 뭘까, 하고 생각해보면, 딸아이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고 나 자신도 아니었다. 삶이 아쉽지 않았다. 읽지 못한 책들, 읽고 싶은 책들, 내 책상, 좋아하는 문구(文具)들. 그저 사물들만이 아쉬울 뿐인 내가 한심했다. 왜, 왜, 어쩌다, 어째서를 따지다 보면 결국 자기파괴적인 생각에 이르렀고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아니, 빠져나오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를 몰아넣음으써 기이한 안정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같은 곳에서 내가 간신히 할 수 있었던 건 '읽기'였다. 질병에 관한 책들, 아픈 사람들이 쓴 책들, 아픈 사람을 돌보는 사람들이 쓴 책들. 지난 8년간 보물찾기하듯 수집했고 수집하는 중이며 끊임없이 수집할 그책들을 어떤 목마름 같은 것에 이끌려 읽었다. 나에게는 구원과 가르침의 원천이라는 점에서는 경전이고 하루씩 더 살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는 천일야화와 같은 책들. 나는 읽고 또 읽었고 새기듯 옮겨 적었다.
그러면서도 한 줄의 글도 못 썼다. 쓰고 싶었는데 쓸 수가 없었다. 일기는커녕 틈틈이 읽은 소설의 독후감조차 쓰지 못했다.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있다는 상황은 이상한 자책감으로 이어졌다. 나는 왜 못 쓰지. 왜 쓸 수 없지. 쓰고 싶은데. 단편(습작) 하나라도 더 쓰고 싶었는데. 써야 하는데. 이런 책망은 자연스럽게 자조 섞인 의아함으로 연결됐다. 사실 너는, 쓰지 못해도, 쓸 수 없어도, 쓰지 않아도 되지 않아? 그런데 왜? 자책감까지 느낄 필요는 없잖아. 오바하지 마. 건방 떨지 마.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_하지만 그런 책이 있다. 내가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책이 나를 읽은 것 같은 책. 내가 책 속 문장에 밑줄을 그은 것이 아니라 책이 내 마음속에 잔뜩 움츠린 무언가에 밑줄을 그은 것 같은 책. 그 투명한 밑줄이 웅크리고 있는 무언가에 살며시 손을 건네는 듯한, 어서 잡으라고 강요하진 않지만 내민 손을 잡을 수밖에 없게 하는, 그런 책. 나에겐 <밑줄과 생각>이 그랬다. 나는 소설가도 아니고 작가도 아니고 글 쓰는 사람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어떤 생각은 인간을 변하게 한다. 생각에 걸맞은 인간으로 느리고 고요히 변화시킨다.(...)언어는 사고를 옮기는 도구지만 그저 도구인 것만은 아니다. 어떤 언어는 살아서 인간에게 들어가 영향을 주고 새로운 생각이 되기도 한다. 생각한 뒤 쓴다. 맞다. 하지만 쓰면 생각이 된다.(...)무슨 생각인지 잘 몰라도 쓰기 시작하면 그 생각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는 것."(p.69)
"소설이 아니었다면 나는 나라는 세계에 도착하지 못했을 것이다. 표면 밑에 심연이 있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타인의 마음에 숲과 바다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거고 인간의 감정과 감각에 바람과 별자리가 있다는 것도 몰랐을 거다. 다시 태어날 순 없다. 나 아닌 다른 것이 될 수도 없다. 그러나 다시 할 순 있다. 어떤 한계 때문에 멈췄던 생각을 발전시킬 수 있고 포기했던 일을 다시 할 수 있고 썼던 자들은 다시 쓸 수 있다."(p.71)
_나는 변하고 싶었다. 책을 읽으며 조금은 변하게 된 "생각에 걸맞은 인간으로" 변화하고 싶었던 거였다. "살아서" 내 속으로 들어온 "언어"들을 좇아 변화된 나로서, 다시 말해 계속 읽고 쓰는 사람으로서, 나는 "다시" 살고 싶은 거였다. "살아서" 내 속으로 들어온 생생한 "언어"는 나에겐 소설이었고, 그런 이유로 나는 소설을 쓰고 싶은 거였다. 소설 속 "인물을 설명하는 문장은 어느새 나를 설명하고"(p.204) 있었으니까. "인물이 겪은 것은 내가 겪은 것, 겪을 수도 있는 것, 겪게 될 것"이니까 소설을 쓰고 싶다는 마음을 미련스럽게도 놓지 못하고 있는 거였다.
이제 나는, 지난 겨우내 잔뜩 겁먹고 주눅든 채 움츠러들었던 나를 "다시" 일으킨다. 나에게 건네진 그 투명한 밑줄의 힘을 빌어 조심스럽게 일어서려 한다. 변화하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므로. 계속 읽고 밑줄을 긋고 계속 쓸 것이다. 끝내 나 혼자 읽고 말게 될 글만을 쓸지라도. 변화된 나로 "다시" 살고 싶은 마음만은 변함없고 변함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밀린 독후감부터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