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같은 글쓰기], 아니 에르노
_'습작'이라 이름 붙인 폴더에 저장해 두었던 파일 하나를 다시 바탕화면에 꺼냈다. 난생 처음 도전했던 공모전에서 탈락한 원고지 718.7매 분량의 내 첫 소설(이라 일컫는 것이 몹시 부끄럽지만)이다. 허구의 인물과 공간이 가미된 그것은 나의, 정확하게는 나와 내 딸의 이야기다. 일종의 자전 소설인 셈이다.
책을 읽고 허접한 독후감이나 끄적이던 내가 언감생심 소설을 쓰겠다 마음을 먹은 이유는 단순했다.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터놓고 말할 수 없었으므로 속으로만 쌓여 문드러지던 내 마음을 쏟아내고 싶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 봐도 나처럼 100만 분의 1의 확률로 발생한다는 희귀난치병을 앓는 자식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엄마는 강해야 한다, 엄마니까 더 힘을 내야 한다는 사람은 많아도 하루에도 수백 번씩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망치고 싶은 옹졸한 내 마음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다. 나는 그런 말을 입밖으로 꺼낸 적 없으니 아무도 내 속내를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소설 속에는 있었다. 갑자기 맞닥뜨린 감당할 수 없는 불행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불운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발버둥치다 끝내 절망의 구렁텅이로 곤두박질치는 제 모습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을 보며 나는 어찌 표현해야 할지 모를 감정을 느꼈다. 공감, 감정이입, 위안, 카타르시스 같은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그것은 쾌감이었다. 어쩐지 불온한 듯 싶지만 기쁨이 분명한 묘한 감정에서 나는 힌트를 얻었던 것 같다. 딸깍, 머릿속에서 어떤 스위치가 켜진 것이다. "허구에 의해 제공되는 자기 방어의 가능성, 다시 말해 "이것은 모두 내가 지어낸 허구일 뿐"이라고 말함으로써 가면을 쓸 수 있는 가능성"(p.33)을 가진 소설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쏠린 것이다.
_소설이라면 날것의 나를 가감없이 드러내도 괜찮겠지. 혹시 나를 아는 지인이 읽게 되더라도 내 이야기라 짐작하지 못할 거야. 소설이니까. 이런 "가면" 뒤에 숨어 나는 작년 봄과 여름, 가을 동안 뭔가에 홀린 듯 이야기를 써내려 갔다. 내 깜냥에 몇 장이나 쓸 수 있겠어, 라는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이야기가 흘러 넘쳤다. 7년 간 마음속에 고여 있던 끔찍한 죄책감과 자괴감, 끝 모를 절망과 우울이 스스로 생명을 얻어 이야기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나오는 것 같았다. (물론 난관에 부딪혀 쓰지 못한 시간들도 숱했다)
공모전 결과는 매우 당연하게도 탈락. 내가 쓴 건 소설이 아니었구나. 끔찍한 자기연민에 빠진 누군가가 허우적대는 어리숙한 이야기에 불과했구나. 깨달음이 찾아왔다. 씁쓸한 한편으론 후련했던 나는 그 원고를 '습작' 폴더에 넣고 다시는 열어 보지 않았다. 그리고 새 이야기를 구상하고 쓰기 시작했다. 거기엔 내 이야기는 없으므로 많이 읽고 많이 보고 많이 듣고 깊이 헤아려야 했다. 그럼에도 진도는 나가지 않았고 수박 겉핥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높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벽에 가로막힌 듯 막막했을 때 이 책을 만났다.
"내가 뽑은 것은 '나'였죠. 어쨌든 반대 결과가 나왔더라도 결국은 '나'로 돌아왔을 거라고 믿어요. 그러한 허구의 틀 속에서 나 자신이 겪은 사회적 상처와 관련된 과거를 의도적으로 떠올렸기 때문이에요."(p.34)
"나는 '보고' '듣지' 않고는 글을 쓸 수 없어요. 내게 그것은 '다시 보기'이며 '다시 듣기'를 의미합니다.(...)그것들을 실제로 보고 있다고 착각할 정도로 끊임없이 되새겨야만 해요."(p.54)
"난 존재들과 사물을 대변하는 배우이자, 그것들이 존재하는 장소이며 그것들의 증인이기도 했습니다."(p.165)
"프루스트는 "진정한 삶, 마침내 '발견하고 해명된 삶', 따라서 실제로 체험된 유일하게 진정한 삶, 그것은 문학이다"라고 명시했습니다. 난 "발견되고 해명된 삶"이라는 이 말을 강조하고 싶어요.(...)글쓰기가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다면, 난 이렇게 말하겠어요. 말, 여행, 광경 등 그 어떤 수단으로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을 글로 쓰면서 발견하는 것. 숙고 또한 홀로는 그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글쓰기 이전에는 현장에 없든 것을 발견하는 것. 바로 거기에 글쓰기의 희열이 있습니다."(p.200)
_"결국은 '나'로 돌아왔을 거라고 믿어요"(p.34) 이것이 한동안 의도적으로 쳐다보지도 않았던 내 첫 원고를 바탕화면에 꺼낸 이유다. 소설이라고 일컫기도 민망한 그것 속에는 민낯의 내가 있기 때문이다. 타인은 물론 스스로에게도 부끄러울 뿐 아니라 감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천벌을 받을 것만 같아 마음 깊은 곳에 꾹꾹 눌러 놓고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는 가장 밑바닥의 내가 허구라는 "가면"을 쓴 채 그 속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를 다시 보고 다시 듣게 되면 나도 소설이란 것을 쓸 수 있지 않을까. 그 언젠가는 나도 누군가 "당신은 바로 내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또는 이 책은 바로 나예요 라고"(p.145) 말해 주는 소설을 쓸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누군가의 소설을 읽고 "더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구원을 받은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