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글프지만, 존증하고 응원하는 마음으로

[나의 아름다운 날들], 정지아

가끔 중고서점에 간다. 대개는 원하는 책 없이 그냥 가는 거다. 국내소설, 영미소설, 유럽소설, 일본소설 순서로 천천히 서가를 살핀 뒤 인문사회 서가로 옮겨간다. 느리고 고요한 시간. 이 시간을 거쳐 나에게 온 보물 같은 책이 꽤 있다. <나의 아름다운 날들>도 그중 하나. 여기엔 “힘없고, 빽 없고, 비빌 언덕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한가득 담겨 있다. 정말이지 한가득한 이야기 중에 나는 노인들의 이야기가 좋았다. 폭 빠져 읽었다. 운이 좋다면 그들처럼 노인이 된, 언젠가의 나를 바라보듯, 그들을 바라보았다. 서럽고 서글프지만, 존중하고 응원하는 마음으로. 나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노인이 되고 싶다.

“간다”(p.208)

“나 없을 때 또 비밀 이야기하면 죽어!”(p.65)

_로터리를 돌아 나가는 차들이 뒤엉킨 혜화동 로터리. 로터리를 둘러싼 널찍한 인도에서 머뭇거리를 세 명의 노인들. 이중 막내가 70대이다. 택시 잡기가 마땅치 않은 그들은 성대 쪽으로 조금 올라가기로 하고 걸음을 옮긴다. 지팡이를 짚고 서로 앞거거니 뒤서거니 하며 느리게. 반 세기 동안 두 형님을 돌보면서도 놀림과 핀잔을 받아온 막내가 택시를 잡고, 몸이 제일 불편한 노인이 먼저 오른다. 한 손에 지팡이를 들고 겨우 차에 오른 그가 문을 닫기 전, 나머지 둘을 일별하며 말한다.

“간다.”

둘은 고개를 끄덕인다. 작별은 평소처럼 무덤덤하다. 이내 문이 닫히고 멀어지는 차의 꽁무니를 두 노인이 물끄러미 바라본다. 또 보자, 라는 인사가 언제부턴가 간다, 로 바뀌었다. 끊임없이 차들이 로타리를 돌아 나오고 역시 막내가 남은 형님을 위해 택시를 잡았다. 그 인사 또한 간결하다.

“간다.”

언제나처럼 70대 막내가 마지막으로 남는다. 두 형님이 떠난 거리,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는 젊은이들로 번잡하다. 젊은이들은 모를 테다. 간결한 인사를 남긴 채 그곳을 떠난 두 노인이 한때 빨치산으로 혹은 켈로로 전장을 누비던 역전의 용사였음을 상상조차 못할 것이다. 제 몸뚱이보다 더 무거운 삶을 지고 그 무게에 짓눌려 살았던 노인의 무게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듯, 거리는 평온하다. _<혜화동 로터리>

_세 친구가 있다. 이름은 각각 하루꼬, 사다꼬, 에이꼬. 읍내에 하나밖에 없던 보통학교에서 처음 만난 그녀들은 식민지 시절 일본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한 탓에 아직도 서로를 일본 이름으로 부른다. 일제강점기, 6.25전쟁, 군부 독재 정권. 그들이 통과한 80년의 생 가운데 있었던 일들이니, 그들의 삶이 어땠을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모두 과부가 된 세 친구는 서로의 집을 드나들며 함께 노년을 보낸다. 에이꼬는 아직도 전전긍긍해 한다. 하루꼬, 사다꼬와 친구로 지내는 70년 세월 동안 늘 그래왔음에도, 여전히 질투나고 조바심을 낸다. 셋이 친구이면 으레 그렇듯, 그중에서도 꼭 둘이 더 친하게 되기 때문이다. 에이꼬는 모르는데 하루꼬는 알고 있는 사다꼬의 비밀이 있었고, 에이꼬는 듣지 못했는데 사다꼬는 이미 알고 있는 하루꼬의 비밀이 있었다. 보통학교 시절부터 예쁘고 똑똑해 잘나가던 사다꼬를 얄밉게 여긴 에이꼬는 평생 하루꼬에게 정성을 쏟았다. 그런데도 80세가 넘은 지금까지도 자신은 모르고 있고 사다꼬만 알고 있는 하루꼬의 비밀이 있음을 알고 에이꼬는 분하고 서운하다. 질투가 난다. 어느 봄날 사다꼬의 집에 모인 세 친구는 점심을 해먹기로 하고, 에이꼬가 정육점에 고기를 사러 가기로 한다. 집을 나서는 길에 에이꼬가 뒤돌아봤더니 사다꼬와 하루꼬가 주방 탁자에 머리를 맞대고 앉아 있다. “야!” 에이꼬가 둘에게 고함을 지른다.

“나 없을 때 또 비밀 이야기 하면 죽어!”

그러고는 쾅, 요란하게 문을 닫은 후, 봄볕 속으로 네 활개를 치며 걸음을 옮긴다. <봄날 오후, 과부 셋>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