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누추한 자리를 비추는 詩

[올드걸의 시집], 은유

나는 원래 눈물이 많았다. 슬플 때는 물론 분하고 억울할 때, 책이나 영화에서 감동을 받았을 때도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먼저 나왔다. 그런데 최근 3년 정도는 덜 울었다. 6년 전 발병한 아이의 병명과 치료법을 알기 위해 대형 병원들을 전전했던 그 몇 년간 평생 흘릴 눈물을 다 흘려서인지, 먹고 있는 항우울증약 덕분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이랬던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눈물을 훔치고 코를 풀면서 마음이 평온해짐을 느꼈다.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던 위로였다. 작가는 '다 잘 될 거야, 힘내' 라는 식의 "치유와 긍정의 말들을 사나운 헤드라이트 불빛처럼 얼굴에 들이대"지 않는다. 단지 알아줄 뿐이다. 여자로서, 엄마로서 그리고 주어진 삶을 살아내는 한 인간으로서 필연적으로 안고 갈 수밖에 없는 고통과 아픔을 그저 알아 줄 뿐이다. 문장 하나 행간 하나를 되읽고 옮겨 적고 마음에 아로새겼다. 느리게 읽고 싶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책은 올드걸인 작가가 시를 통해 살아갈 용기를 얻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생이 가하는 폭력과 혼란"에 빠져 고통스러울 때마다 책장 앞에 주저앉아 시집을 읽었다는 작가는 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시는 은은히 촛불을 밝혀 삶의 누추한 자리를 비춰 주니까. 배신과 치욕과 절망과 설움이라는 분명히 존재하는 삶의 절반을, 의도적으로 기피하고 덮어 두는 그 구질구질한 기억의 밑자리를 시는 끝내 밝힌다. "인간은 자기가 어떻게 절망에 도달하였는지를 알면 그 절망 속에서 살 수 있다"는 벤야민의 말을 나는 시를 통해 이해했다. 시를 읽는다고 불행이 행복으로 바뀌지는 않지만 불행한 채로 행복하게 살 수는 있다. 황동규 시인이 말했듯이 "시는 행복 없이 사는 훈련"인 것이다."(p.18)


나는 "시"가 들어가는 자리에 "소설"을 넣어 읽었다. 시 무지렁이인 나에게는 소설이 그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작가처럼 유려하게 글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나 역시 불행의 긴 터널을 소설을 읽으며 겨우 지나고 있기에, 책속 모든 문장이 "혈관주사처럼 피로 직진"했고 기다렸다는 듯 몸속 세포가 이를 빨아들였다. 살아가는 일이란 "남루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만으로도", "삶은 빠져나갈 외부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한결 수월해질 수 있음을 온몸으로 이해했다. 작가가 언급한 시인들의 시집을 따로 메모해두고 하나씩 읽으리라 마음먹었다. 시의 여백을 서성이며 그것이 내포한 깊이를 헤아리는, 그 쓸쓸한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책이 온통 무거운 것만은 아니다. 작가는 소소한 일상, 이를테면 "매번 돌아오는 영원한 끼니의 회귀" 같은, 지겹도록 반복되는 일상에서 건저낸 작지만 의미 있는 깨달음을 위트 있게 전한다. 눈물을 휴지로 찍어내는 와중에 큭큭 웃음이 나와 괜히 멋쩍기도 했다. 내 귀에 들리는 내 웃음소리가 나를 더 쓸쓸하게 했지만 말이다. 특히 엄마의 역할을 맡은 이라면 어지러울 정도로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할 아래와 같은 문장에서는 작가가 오래 알고 지낸 친한 언니 같아 친근감도 들었다.


"가족들이랑 캐리비안베이 가는 거 말고, 내가 정말 가고 싶은 데는 여수 밤바다. 혼자서 가고프다.(...)민박집에서 하루 종일 방 끝에서 방 끝으로 뒹굴면서 책 보고 밤이면 파도 소리 들으면서 글 쓰고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여섯 시간째 뱃속이 텅 비었다고 전화하는 딸내미에게 즉시 달려가지 않아도 되면 나의 인생이 더 고상해질까. 밥에 묶인 삶. 늘 떠남의 욕망에 시달린다."(p.118)


작가의 책들은 늘 옮겨 적고 싶은 문장이 많다. 그동안 감탄하면서도 궁금했다. 어쩌면 세상을 보는 시선과 사유가 이토록 깊을까, 어쩌면 이렇게 진솔하고도 아름답게 글을 쓸 수 있을까. 이 책을 읽고 알았다. 타고난 성정과 재능, 그간 많이 읽고 써온 덕분도 있겠지만 철학을 꾸준히 공부해왔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건방질 수도 있지만, 대체로 순탄한 삶을 살아왔거나 현재 삶에 만족하는 사람에게는 이 책을 추천하지 않고 싶다. 대신 "오래 고통받는 사람", 삶이 버거운 사람, 더이상 내려갈 데 없는 바닥이라 생각했는데 더 깊은 바닥이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은 사람에게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고통스러운 감정은 정확하게 묘사하는 순간 멈춘다"는 말의 의미를 뼈저리게 이해하고 슬픈 채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음을 아는 사람에게 이 책은 따스한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