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학', '역학 조사'라는 말을 요즘처럼 자주 들은 적이 없는 것 같다. 코로나 확진자의 동선을 파악하는 작업 정도로 통용되는 '역학'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지역이나 집단에서 일어나는 질병의 원인 등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 책은 '사회역학'에 관한 책이다. '역학'이 흡연이 폐암의 원인이고 노동자가 벤젠에 노출되면 백혈병에 걸릴 수 있다는 점을 알아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면, '사회역학'은 차별과 사회적 고립, 고용불안 등이 인간의 몸을 해칠 수 있다는 연구 가설을 탐구한다. 즉 '사회역학은' 질병의 사회 정치적 원인을 찾고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바꿔 사람들이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는 학문이다.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스미는 것처럼 인간의 몸에는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시간이 새겨집니다."(p.22)
바다 속 물고기가 그러하듯, 사회 속에서 수많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인간의 몸에 사회의 흔적이 남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 흔적은 종종 질병이라는 형태로 우리에게 새겨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질병의 원인을 개인에게서 찾고 개인적 차원에서 해결하려 애쓴다. "사회적 환경과 완전히 단절되어 진행되는 병이란 존재할 수 없"는데도 말이다. 사회역학자인 저자는 묻는다.
사회적 상처가 어떻게 인간의 몸을 병들게 하는지 알고 있습니까? 개인의 질병에 대한 공동체의 책임은 어디까지라고 생각합니까?
"원인의 원인". 말 그대로 어떤 일의 원인에는 이를 야기한 또다른 원인이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당뇨병의 원인은 노화와 가족력, 고혈압 등이다. 이 중 처음부터 주어진 것으로 여기는 가족력조차도 사실은 사회적 요인과 상호작용하면서 질병 발생에 영향을 준다. 즉 당뇨병의 원인(중 하나인 가족력)의 원인은 - 당사자나 그의 조상이 어떤 사회, 정치, 경제, 문화적 토대 위에서 살아왔느냐 하는 - 사회구조라는 말이다.
책에 의하면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소득이 없는 노인이, 차별에 노출된 결혼 이주 여성과 성소수자가 더 일찍 죽는다고 한다. 질병의 사회적 원인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분포되어 있지 않기에 더 약한 사람들이 더 위험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더 자주 아프다. 모두가 평등하게 맞이하는 계절인 듯 해도 누군가는 더 더운 여름과 더 추운 겨울을 보내고, 세계적으로 전염병이 창궐해 백신이나 치료약이 개발되어도 가난한 국가의 사람들은 이를 제공 받지 못해 더 많이 죽어간다. 가장 위험한 작업은 규제의 손길이 닿지 않는 하청 기업의 가장 약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넘어가 제2, 3의 김용균을 낳고 있으며, 세월호 참사의 피해자이자 생존자인 학생들은 아직도 '세월호 빽'이라는 따가운 시선을 감당하고 있다. 오랜 시간 혐오와 차별의 대상이었던 성소수자들의 정신은 피폐해진다. 이렇듯 개인만을 본다면 특정 질환을 가진 환자일 뿐이지만,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보면 이들을 아프게 했던 "원인의 원인"이 비로소 보이는 것이다.
저자는 다양한 사례나 실험을 통해 도출된 데이터를 제시하며 사회적 상처가 우리의 몸을 어떻게 병들게 하는지 상세히 설명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책을 읽고 나니 각종 도표 속의 통계들이 단순한 숫자로 보이지 않았다. 그것들은 사회적 원인이 있는 질병임에도, 이 사회가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긴, 그래서 우리가 모르는 채 혹은 알고도 모르는 척 떠안게 된 아픔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아픔이 아픔으로만 남지 않고 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너다". 이 문장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시인 황지우의 시집 제목인 이것은 '구의역 김군'을 추모하기 위해 스크린 도어에 붙여 있던 포스트잇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것은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 모두가 모르거나 잊어버린 말이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결국 "나는 너"일 수밖에 없다는, 소름 끼치도록 무섭고도 아름다운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아픔은 길이 될 수 있을까.
"아름다운 사회는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예민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 그래서 열심히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그들의 자존을 지킬 수 없을 때 그 좌절에 함께 분노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회라고 생각해요"(p.303)
나이 들수록 주변에 무심해지는 나를 경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파파 할머니가 되어서도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나아가 함께 행동할 수 있는 감수성과 용기를 간직한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