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는 '그 책'이 있습니까?

[헌책방 기담 수집가], 윤성근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어느 오후, 약속에 늦은 여자는 버스에서 내려 걸음을 재게 서두른다. 먼저 도착한 남자가 정류장 근처 '글벗서점'에서 기다릴 테니 천천히 오라고 했지만 여자는 마음이 급하다. '글벗서점'은 신촌에서 홍대 산울림소극장 쪽으로 향하는 길모퉁이에 자리한 헌책방이다. 여자는 살그머니 책방 문을 열고 들어간다. 오래된 종이와 먼지 냄새가 문이 열린 사이 들어온 찬 공기와 뒤섞여 오묘한 향을 만들어낸다. 남자에게 전화 하려던 여자는 빼곡한 책의 기운에 눌려 주머니에 휴대폰을 넣는다. 서가 사이 통로에도 책이 잔뜩 쌓여 있어 여자는 조심스레 걸음을 옮긴다. 저기 서서 책을 읽고 있는 남자가 보인다. 사뭇 진지하게 책을 읽는 남자가 멋있어 보여 여자는 가슴이 두근거린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미소를 머금은 남자가 고개를 돌린다.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나의 빛바랜 이야기다. 이별 후에는 일부러 피해 다녔던 '글벗서점'은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아무튼 내게 헌책방은 옛사랑을 소환하는 버튼 중 하나이다. 그러니(?) 나는 제목부터 '헌책방' 들어가는 이 책에 끌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저자는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이라는 작은 헌책방의 책방지기다. 겉보기엔 보통 헌책방 같지만 그는 그곳에서 책과 사람에 얽힌 이야기를 수집한다. 헌책방에서는 절판된 책을 찾아달라는 손님을 자주 만나는데 짧게는 몇 달에서 몇십 년씩 책 한 권을 찾아다니는 사람도 있고, 찾아주기만 하면 사례비를 주겠다는 이도 많다. 오랫동안 책을 찾아다니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인 법! 저자는 책 찾기를 의뢰하는 손님의 이야기가 흥미로우면 책을 찾아주고 수수료 대신 사연을 받는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 주변엔 의외로 기묘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이제부터 여러분이 보게 될 이야기는 소설이 아니다."(p.11)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고 했던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것을 초월하는 일이 벌어지는 곳이 이 세상이라는 사실은 뉴스 기사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팬데믹 상태가 3년 차로 접어든 오늘 역시 픽션 같은 하루이니까. 그런데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이 더욱 소설 같은 이유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운명을 이어주는 매개가 한 권의 책이기 때문이다. 그 책은 가슴 저린 옛사랑이나 세상을 떠난 가족이었고, 삶을 뒤흔든 중요한 계기이자 기억이 사라지면서도 놓을 수 없는 존재였으며 행운을 점치는 도구이기도 했다. 책이라는 것은 "마법이 깃든" 영물(靈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모든 책에 사람들의 사연이 더해져 '새로운 책'으로 재탄생한다고 본다면, 대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책이 존재하는 것일까.


한 노인의 이야기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평생 교육자로 살았던 노인은 책을 많이 읽고 수집했다. 치매 진단을 받은 몇 년 전부터 요양원에서 지내는데 증상이 심해졌음에도 그는 늘 책을 찾았다. 읽지 못하더라도 그걸 가지고 있을 때 몸 상태가 편해 보였기에 노인의 딸은 그가 말하는 책을 집에서 찾아 오곤 했다. 그 책의 제목은 손녀딸의 휴대폰에 담겨 있었다. "책캐구우초오교오." 할아버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손녀가 영상으로 찍어 저자를 찾아온 것이다. 노인의 집에 가서 직접 책을 찾아주면 안 되겠냐는 그녀의 부탁에 노인의 서재를 본 저자는 소름이 돋았다. 방 세 개에 꽉 들어찬 책은 어림잡아도 3만 권 이상 되어 보였기 때문이다. 집 안을 가득 채운 3만 권의 책이라니! 마침내 저자는 손녀에게 한 권의 책을 찾아 건네고, 요양원에서 그것을 받아 든 노인의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지어졌다. H.V. 마틴의 <켈케골의 종교사상(1960년, 성암문화사)>라는 책이었다.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삶의 마지막을 평생 아낀 책과 함께하고 싶은 노인의 마음은 과연 어떤 것일까. 그 간절함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나에게는 꼭 '그 책'이 아니면 안되는 책은 없었다. 옛 연인이 그때 들고 있던 책 제목이라도 눈여겨둘 걸 그랬나, 한심한 후회만 들었을 뿐이다.


그 시간과 그 장소, 그 사람의 기운이 깃든 '그 책'이 아니면 안 되는 사람들, 오랜 시간 '그 책'을 찾아 헤맨 사람들의 마음에는 무엇이 깃들어 있을까. 그리고 마침내 '그 책'을 품에 안았을 때 그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경험해보지 않았으므로 몹시 궁금한 나는 지금부터라도 나만의 '그 책'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