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풍요로운 영혼의 안식처
[달팽이 안단테], 엘리자베스 토바 베일리
by 디디의 노블 테라피 Feb 24. 2022
_"저녁이 되면 달팽이는 어김없이 잠에서 깨어 놀라울 정도로 우아하게 화분의 가장자리로 이동해서는 자기 앞에 높인 낯선 풍경들을 다시 한번 찬찬히 둘러보았다. 마치 고성 안에 우뚝 솟은 작은 탑 주위를 살피고 있는 제왕처럼 사려 깊은 모습으로 멀리서 울려오는 선율에 맞춰 춤추는 것처럼 더듬이를 이리저리 물결치듯 흔들었다."(p.30)
이 대목에서 달팽이 영상을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느릿느릿 미끄러지듯 기어 가다 멈추고는 투명한 더듬이 네 개를 "이리저리 물결치듯" 흔드는 모습은 마치 "안단테"의 속도로 지휘하는 듯 했다. 상추나 당근 등 먹이를 먹는 영상도 보았다. 2배속 편집했다는데 먹이에 입을 파묻고 꼬물꼬물 먹는 모습이 의외로 꽤 귀여웠다. 넋 놓고 바라보다가 어느새 무념무상 상태에 이른 나를 발견했다. 쉴 틈 없이 어수선하고 시끄럽던 머릿속이 고요해져 있었다. 달팽이의 타고난 느릿함 덕분인 듯 했다. 이참에 한 마리 키워볼까, 하는 생각도 잠시 스쳤지만..재작년 가족이 외출한 사이 몸이 차갑게 굳은 채 죽어 있던 햄스터 '사랑이'가 떠올라 이내 마음을 돌렸다. 한 생명을 거두는 일이란 충동적으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니까.
_저자인 엘리자베스는 서른네 살에 떠난 짧은 유럽 여행에서 심각한 신경장애를 유발하는 미확인 바이러스성 병원체에 감염되어 일생 동안 극심한 통증과 함께 누워서 지내게 되었다.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인생이고 언제든 불행의 올가미에 걸려들 수 있는 것이 운명이라지만, 휴식을 위해 떠난 여행길에서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지게 할 치명적인 병에 걸릴 것이라 누가 예상할 수 있겠는가.
병이 언제 나을지, 아니 나을 수나 있는 건지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침대에 누워 지낼 수밖에 없는 그의 고통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질병의 불확실성, 이것이 주는 공포와 불안감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다. 매순간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긴장과 두려움이 일상을 잠식해가는 것을 무력히 바라볼 수밖에 없는 삶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나 자신이라는 현실. 이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참혹함을 대체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게다가 과거 건강했던 기억마저 그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쉽게 미쳐버리지도 않는 말짱한 정신이 그 기억에 달라 붙어, 상실감과 박탈감의 심연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건강을 잃었지만 치료법은 없는 현실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순간순간을 참고 이겨내는 것이 다"(p.20)인 극한의 무력감. 건강한 사람은 절대, 조금도 헤아릴 수 없는 무참한 고통임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자연 세계는 인간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요로운 영혼의 안식처다."(p.8)
어느날 그에게 찾아온 작은 생명체 달팽이. 그는 친구가 숲속에서 주워 온 달팽이 한 마리와 동거를 시작한다. 온종일 침대에 누워 꼼짝 못하는 그에게 고개만 돌리면 볼 수 있는 달팽이는 유일한 동반자였다. 낮 동안 침대에만 누워 있는 자신이 쓸모없다고 느껴질 때 옆에서 늘어지게 자고 있는 달팽이를 보며 무력감을 덜어냈고, 통증으로 밤새 잠 못 이룰 때 야행성 달팽이가 여기저기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그는 잠시나마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변한 것 하나 없이 어김없이 밀려드는 비참한 현실 속에서 달팽이는 그가 "미치지 않도록 도와주는 구세주이자 버팀대"(p38)였다. 그렇게 달팽이는 그에게 없으면 안 되는 소중한 존재가 된 것이다. 그는 매일 달팽이를 섬세하게 관찰해 일지를 작성하는 것도 모자라 달팽이 관련 책은 모두 읽기 시작한다. 이 책을 쓰기 위해 달팽이 관련 책 20권, 관련 논문 18편, 기타 과학문헌 26건을 읽었고 연체동물 연구자들의 자문도 받았다고 하니, 달팽이를 향한 그의 진심은 그야말로 찐(?)인 셈이다. 이 책은 "존재론적 깊이와 문학적 향기"(p.205)가 넘실대는 에세이인 동시에 일종의 달팽이 과학서로 보아도 충분할 정도로 달팽이에 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
"녀석이 미끄러지듯 기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어느새 기분도 좋아지고 명상에 잠기기도 했다. 몹시 흥분하거나 낙담 했을 때도 고요하게 천천히 움직이는 녀석을 보노라면 점점 마음이 가라앉곤 한다."(p.42)
"달팽이가 그저 묵묵히 미끄러지듯 기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었고 깨달음이었으며 아름다움이었다. 달팽이의 타고난 느린 걸음걸이와 고독한 삶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어둠의 시간 속에서 헤매던 나를 인간세계를 넘어선 더 큰 세계로 이끌어주었다. 달팽이는 나의 진정한 스승이다. 그 아주 작은 존재가 내 삶을 지탱해주었다."(p.180)
__우리는 '사람'이 지긋지긋하거나 삶의 어둑어둑한 길목을 지나야만 할 때면 본능적으로 자연에 눈을 돌린다. 태초에 자연에서 생겨났기에 자연으로부터 기운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내 경우엔 나무다. 그것도 한겨울 나뭇잎 하나 없이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 겨울눈을 달고 있는 아직 헐벗은 나무다. 이 나무들도 나처럼 속으로 울면서 이 악물고 견디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게 그렇게 힘이 된다. 한여름 검푸른 잎이 무성히 들어찬 나무의 기가 질리도록 왕성한 생명력에서는 구할 수 없는 나만의 위안이다.
때로 지치고 외로운 당신을 지탱해주는 자연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