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말해 줄래요?], 황승택
_잿빛 우주를 유영하듯 떠 있는 우주비행사가 있다. 그 주위로 홀로그램빛 작은 별들이 반짝인다. 자세히 살펴보면 별이 아니다. 무질서하게 흩뿌려진 작은 글자들이다.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 건 우주인뿐만이 아닌지 글자들도 아무렇게나 둥둥 떠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심오한 의미를 품고 있지는 않다. "비용이 청구됩니다, 예약하시겠어요?, 지금 목소리가 너무 커요, 종이봉투를 쓰실 건가요?"와 같은 일상적인 말들. 이런 사소한 언어들은 우주인에게 약간의 거리를 둔 채 떨어져 있다. 우주인이 그것들에 근접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둘 다일 수도 있고.
이 책의 겉표지 디자인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겉표지를 다시 본 느낌은 처음 책을 받아들었을 때와는 달랐다. 먹먹했다. 막 이륙한 비행기에 탔거나 해발고도가 높은 산에 올랐을 때처럼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것 같았고, 체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이기 마련이다. 알지 못해서 혹은 알고 싶지 않아서 엄연히 존재하는 많은 것을 보지 못하고 살아간다. 자신이 보지 못한다는 것조차 모르는채로.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경험하지 않으면 모른다. 세상에는 본인이 직접 고난을 경험하거나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이 겪는 걸 지켜본 경험이 없다면 생각해 볼 기회조차 없는 것들 천지다.
_"(...)힘겨웠던 15분간의 외출이 끝나자 그동안 살아오면서 당연하게 느꼈던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청력을 기본 값으로 세팅한 한국 사회는 청력에 문제가 없는 사람에게는 편리한 나라지만 청각 장애인에게는 어떤 위험이 도사릴지 모르는 아마존의 정글이다. 이 정글은 시각, 청각, 정신 등 각종 장애가 생겨야 비로소 정체를 드러낸다."(p.51)
저자는 "화농성 중이염" 진단을 받고 3개월 동안 청력을 잃었다. 염증을 제거한 수술 부위가 완전히 아물어야 청력 회복을 위한 인공와우를 삽입할 수 있는데 상처가 아무는데 3개월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태어나면서부터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들어왔던 세상의 모든 소리와 완전히 단절된 채 살아야 하는 사람의 심정은 어떠할까. 불의의 사고나 질병으로 인해 갑자기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고, 움직이지 못하게 된 이들의 박탈감과 절망을 우리는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들의 고통을 곁에서 지켜보며 돌봐야 하는 가족의 상실감과 침통함을 우리는 얼마나 헤아릴 수 있을까. 장애로 인해 맞닥뜨리게 되는 온갖 현실적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내가 혹은 사랑하는 가족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로 인한 절망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보통 사람은 상상할 수 없는 처절한 번뇌에 시달린다. 3개월 뒤면 다시 들을 수 있다는 낙관적인 미래가 예정된 저자 또한 그랬다. 인공와우를 삽입했는데도 듣지 못하게 되면 어떡하지, 라는 불안감과 두려움도 함께.
모든 소리와 차단된 채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크고 작은 문제에 직면하게 된 그는 비로소 깨닫는다. 사회의 제도와 시스템, 건물과 교통 수단 등 모든 것이 장애가 없는 신체를 기준으로 설계되었다는 것을, "우리 사회의 기본갑은 비장애인"이라는 것을. 집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장애인에게는 모든 것이 위험이고 위협이며 불편이다. 집 안이라고 해서 온전히 안전하고 편리한 것도 아니다. 청력을 잃은 그에게는 소리로만 알려주는 화재경보 시스템과 아파트 관리사무실 안내 방송, ARS 상담 및 인증 서비스 등도 안전을 위협하고 불편을 초래하는 문제점이었다.
"나는 비로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국가의 제도나 사회 운영 시스템에서 소외된 적이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40대 중반까지 살아오면서 내 능력의 한계가 아쉽고 다른 이의 성취가 부러운 적은 있지만(...)원천적 기회가 차단된 경험은 해 본 적이 없었다.(...)마치 공기처럼 내가 아무 의심 없이 당연하게 누려 왔던 제도와 시스템의 혜택이 다양한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고 때로는 험난한 투쟁을 해도 얻을 수 없는 특권일 수 있음을 깨달았다."(p.176)
장애인은 소수고 비장애인은 다수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효율성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다수의 편리를 우선한다는 게 잘못은 아니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모두가 함께 안전하고 편리하면 안되는 것일까. 소수의 약자를 배제하거나 소외시키지 않으면서 다같이 주어진 삶을 살아가면 안되는 걸까. 정책이나 제도를 만들 때 그것의 부작용으로 혹은 사각지대에서 피해를 보는 계층이 없는지 살펴 배려하면 안되는 걸까. 장애인의 권리를 배제하지 않으면서 공공선을 위한 대의를 추구하는 방법은 분명 존재한다. 다만 생각하지 못하거나 생각할 생각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런 무신경함과 무관심 자체가 장애인에게는 사회의 "부적격자"라는 낙인을 찍는 행위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장애와 질병을 당사자와 가족이 오롯이 책임져야 할 개인적인 문제로 한정해서는 안된다. 장애나 질병은 사회 구성원 누구나에게 예고 없이 갑자기 닥칠 수 있는 사건이다. 그렇기에 장애나 질병을 가진 사람도 최대한 일상 생활을 영위하고 경제적 자립을 할 수 있도록 직업을 포함한 포괄적 사회안정망 구축은 필수다."(p.126)
_나 역시 오랫동안 장애인의 삶은 그들만의 사정이라고, 나와는 전혀 관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칠 년 전 아이의 발병을 처절하게 겪으면서 비로소 보이고 알게 된 것들이 생겼다. 내가 어쭙잖게 알고 있던 세계는 손바닥보다도 작은 것이었다는 사실도. 물론 장애와 질병을 경험하게 되는 일은 되도록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직접 경험해야 알 수 있다고 해서 그런 불행을 겪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당연하다.
그러므로, 그럴수록 장애와 질병을 안고 살아야 하는 삶에 대해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책을 읽든, TV이나 영화를 보든 어떻게 해서든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보이니까, 보이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행동으로 옮길 수 있으니까. 실천하지 못해도 최소한 불편한 마음이 드니까, 마음이 불편하면 장애인을 바라보는 뾰족한 시선이 조금은 뭉툭해질 테니까.
"'왜 이런 것까지'라고 불평하기 보다 '이런 것도 함께'라는 연대 정신이 그 어느 때 보다 더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p.165) 결국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다 같이 살아가야 하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