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밤], 존 디디온
_2011년 늦가을, 아이가 생긴 것을 알았다. 오래 기다린 아이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고 주변으로부터 축복을 받았다. 임신 기간 동안 나는 '많은 준비'를 했다. 아이 방을 꾸미고 아이의 옷, 침대와 침구, 유모차와 아기띠, 기저귀와 분유병을 샀다. "국민 OO" 이라 불리는 육아 용품은 (필요가 없어 보여도) 꼭 구비해야만 할 것 같아 구매해두었다. 태교는 책 읽기, 음악 듣기, 걷기, 손바느질이었다. 엄마가 손가락을 많이 쓰면 아이 머리가 좋아진다는 말을 듣고 배냇저고리, 애벌레와 토끼 인형, 손발싸개 등을 한땀 한땀 만들었다. 예정일이 다가오자 출산 가방을 챙겼고 진통이 와 병원으로 향하면서 생각했다. 이만하면 '준비'가 다 된 거겠지? 2012년 7월 9일, 10시간의 진통 끝에 아이가 태어났다.
그후로 10년이 지났다. 아이 엄마라면 누구나 겪는 고된 육아를 경험했고 복직 후 3년 여간 전쟁 같았던 워킹맘 생활을 했다. 그때 나는 수없이 깨달았다. 나는 엄마가 되기 위한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을. 괜한 사람들을 원망했다. 이를테면 친정엄마와 선배 엄마들. 엄마가 된다는 것의 진짜 의미를 어째서 구체적으로, 사실적으로 말해주지 않았는지 탓했다. 아이가 5살이던 해 여름, 백만 분의 일의 확률로 발생한다는 불행이 들이닥쳤고 그것은 지금까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아이는 병원을 전전했다. 나는 우울증을 얻었고 10년간 다녔던 정년이 보장된 직장을 관두어야 했다. 나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2011년 늦가을 이후 오늘까지 , 나는 엄마가 되기 위한 '준비'가 된 적이 없었다는 것을.
_"아기를 입양하는 것을, 아니 어떤 식으로든 아기를 갖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축복'의 측면을 강조한다. 우리는 돌연한 오싹함의, 그 '만약'의 확실한 실패로의 추락의 순간을 말하지 않는다. 만약 이 아기를 보살피는데 실패한다면? 만약 이 아기가 건강하게 자라지 못한다면? 만약 이 아기가 나를 사랑하지 못한다면?(p.79)
"그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부터는 나는 한 번도 두렵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나는 수영장, 고압선, 싱크대 밑의 잿물, 약장의 아스피린, (...), 문가의 낯선 사람들, 원인을 알 수 없는 고열 (...). 두려움의 원천은 명백했다. 그 아이에게 닥칠 수 있는 위해였다.(p.74)
"전반적으로 아기를 갖는다는 것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관해 내가 얼마나 잘못 알고 있었는지를 말하기 위한 방편일 따름이다. 어떻게 잘못 알지 않을 수 있겠는가?"(p.98)
"우리는 점점 아이의 삶에 대한 이처럼 증대된 개입을 그들의 생존에 필수적인 것으로 합리화한다. 우리는 아이의 전화번호를 단축 다이얼에 넣어둔다.(...) 우리는 그들의 움직임을 추적한다. 우리는 아이가 우리 전화에 모두 응답하기를, 변경된 계획에 관해 빠짐없이 보고하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그들의 감독되지 않은 모든 만남에는 전례 없는 새로운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상상한다."(p.136)
존 디디온은 서른한 살에 "아름다운 여자아기"를 입양했다. 사랑으로 키웠지만 딸은 서른아홉 살이 되던 해 세상을 떠났다. 저자는 딸을 잃고 5년이 지난 일흔다섯 살이 되어서야 딸의 이름을 듣고서 울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푸른 밤>을 썼다. "자식이 있다는 것의 의미"와 "부모가 된다는 것의 그 모든 불가해한 비밀"을, 지난 날엔 결코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나이듦과 병듦을,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그리고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참척의 고통에 대해서.
구슬픈 노랫말 같기도, 애끓는 한 편의 시 같기도 한 이 책을 읽어내려가는 동안 내 마음도 함께 가라앉았다. 자식이 생겨 엄마가 된 지난 10년 동안 숱하게 시달려온 자책감과 죄책감, 수치심의 심연에 다이빙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아직도 엄마가 될 '준비'가 안 된 나는 위에서 인용한 문장들 앞에서 얼어붙은 듯 꼼짝할 수 없었다. 정제된 듯 하지만 행간에 꾹꾹 눌러 담아둔 침통함이 살갗으로 느껴져 아릿했다. 슬펐고 서글펐다. 동시에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음속에서 무언가 씻겨내려가는 것 같았는데 어쩌면 이를 두고 정화작용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작가 자신이 "<푸른 밤>을 쓰면서 치유의 힘을 경험했다고 술회"(p.262)했듯이. 그녀는 결국 받아들인 것일까. 나에게는 될듯 말듯, 여전히 어려운 수용(受容)을 경험한 것일까.
_"우리가 자식에 관해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자식이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말하는 것일까? 자식이 없다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말하는 것일까? (...) 부모가 된다는 것의 그 모든 불가해한 비밀을 말하는 것일까?"(p.25)
정말이지 "불가해한 비밀"이다. 영원히 원점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비밀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