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잀는 슬픔, 말하는 사랑], 황인찬
_'읽는 슬픔, 말하는 사랑'. 이보다 더 어울리는 제목이 있을까.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도 어떤 묘한 여운에 머물러 있다가 든 생각이다. 시.알.못인데다 시를 즐겨 읽는 편도 아니지만 어쩌다 가끔 시를 읽을 때마다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이 있는데 바로 슬픔과 사랑이다.
시에서 슬픔은, 철철 흘러넘치거나 옅게 묻어나기도 한다.
시에서 슬픔은, 기쁨을 가장해 숨어 있거나 사소한 낱말에 태연히 깃들어 있을 때도 있다.
시에서 슬픔은, 며칠 뒤 잠자리에서 문득 제 정체를 드러내 잠을 못 이루게 한다.
'슬픔'의 자리에 '사랑'을 대입해도 마찬가지다. 빛 속에서 그늘을 찾아내는 대회(?)가 열린다면 1, 2위 자리를 놓고 다투는 사람은 소설가와 시인일 것 같다. 반대로 그늘 속에서 기어코 빛을 찾아내고야마는 사람도 소설가와 시인이지 않을까. 걸국 소설가와 시인은 '사랑'을 말하는 사람이다. 세상 존재하는 모든 사랑을, 아니 존재하지 않는 사랑까지도 말하고 싶어 하는 사람.
<읽는 슬픔, 말하는 사랑>은 마흔 아홉 편의 시를 담은 시선집이다. 각 시마다 황인찬 시인의 에세이가 곁들여 있어 시를 감상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어떤 에세이는 그 자체로 한 편의 시 같기도 하다. 그래서 나처럼 산문을 더 좋아하지만 시를 알고 싶은 사람, 시와 산문을 동시에 읽고 싶은 사람, 시 같은 산문을 읽고 싶은 사람에게 맞춤한 책이다. 늘 좋은 책 소개해주시는 #한사람을위한문학이야기 정용준 작가님 감사합니다.
_슬픔이 옅게 묻어난 시
<너 혼자>, 박상순
1. 너 혼자 올 수 있겠니
2. 너 혼자 올라올 수 있겠니
3. 너 혼자 여기까지 올 수 있겠니
안개가 자욱한데. 내 모습을 볼 수 있겠니. 하지만 다행이구나 오랜 가뭄 끝에 강물이 말라 건너기는 쉽겠구나. 발밑을 조심하렴. 밤새 쌓인 적막이 네 옷자락을 잡을지도 모르니 조심해서 건너렴.
나는 삼십 센티미터의 눈금을 들고, 또 나는 사십 센티미터의 눈금을 들고, 또 나는 줄자를 들고 홀로 오는 너를 기다리고 있단다.
1. 너 혼자 말해볼 수 있겠니
2. 너 혼자 만져볼 수 있겠니
3. 너 혼자 돌아갈 수 있겠니
바스락 바스락. 안개 속에 네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들리는구나. 네가 네 청춘을 밟고 오는 소리가 들리는구나. 하지만 기운을 내렴.
한때 네가 두들기던 실로폰 소리를 기억하렴, 나는, 나는, 삼십과 사십 센티미터의 눈금을 들고, 줄자를 들고, 홀로 오는 너를 기다리고 있단다. 딩동동 딩동동, 네 주머니 속에서 울리는 내 소리를 기억하렴. 하지만,
1. 너 혼자 내려갈 수 있겠니
2. 너 혼자 눈물 닦을 수 있겠니
3. 너 혼자 이 자욱한 안개 나무의 둘레를 재어볼 수 있겠니
_잠자리에서 문득 제 정체를 드러내 잠 못 이루게 한 시
<꿈>, 황인숙
가끔 네 꿈을 꾼다.
전에는 꿈이라도 꿈인 줄 모르겠더니
이제는 너를 보면
아, 꿈이로구나,
알아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