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3학년.
진로를 결정해야 했지만,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친구들은 다들 가고 싶은 대학교가 있는 듯했는데
내 머릿속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뭘 해야 되지?
꿈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LG.Philips LCD에서 우리 학교로 입사설명회를 왔다.
그해 우리 학교에 기업이 직접 와서 설명회를 한 건 그 회사가 처음이었다.
그 당시 LG.Philips LCD는 이렇게 말했다.
“신입사원 초봉, 연봉 2,400.”
2005년 기준, 2,400만 원.
지금 생각하면
“2,400 갖고 뭘 해?” 싶겠지만
그때는 정말 입이 떡 벌어지는 돈이었다.
“뭐…? 2,400만 원?”
나는 처음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그날 이후로 그 회사가 머릿속에 맴돌기 시작했다.
며칠 뒤,
선생님이 학생들을 한 명씩 불러 개별 상담을 했다.
나는 진심으로 물었다.
“쌤, 저… LG 취업 가능할까요?”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니 성적이면 충분히 가능하다. 넣어보자.
아.. 근데… 출결이 좀 그렇네.”
맞다.
나는 지각도 많고, 결석도 많았다.
출결은 형편없었다.
그래도 선생님은 지원서를 써주셨다.
나도 그 길로 면접 준비를 시작했다.
자기소개는 인터넷에서 베꼈다.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자랐고, 그리고 어떻게 되겠다…’
전형적인 그 레파토리. 그걸 대충 외웠다.
기억도 잘 안 난다. 너무 오래전이라.
그리고 면접 날.
같은 반 친구들과 함께,
그 회사에 지원한 학생들과 나란히 면접장에 들어갔다.
그날따라 단정하게 다려진 교복, 떨리는 손, 그리고 연습했던 자기소개.
면접장 입구에서, 우리는 회사 로고가 박힌 보조가방을 하나씩 받았다.
그당시 유행하는 스타일의 스포츠 디자인,
검정색에 LG 로고가 박힌 크로스백 보조가방이었다.
나는 그 가방을 받아들고 긴장한 채 면접장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나에게 날아온 첫 질문.
“김다은 학생은 출결이 많이 안 좋네요.
이래서 우리 회사에서 성실하게 근무할 수 있겠습니까?”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그런데 어쩐지,
나는 그 순간 이상하게도 또렷해졌다.
”지금은 제가 학생이고, 귀사에 입사를 하게 되면 성인일 겁니다.
지금은 제가 돈을 내고 공부하는 입장이라 느슨했지만,
회사에 들어가면 저는 돈을 받고 일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 입장에서, 이렇게 나태하게 행동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양처럼 떨리고 더듬거리는 목소리였지만, 저렇게 받아쳤다.
지금 생각해봐도 어린 19살의 내가 어떻게 그 말을 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보니, 면접관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영어 공부하고 있다고 했죠?
간단하게 영어로 자기소개 해볼 수 있을까요?”
정말 머리가 하얘졌다.
나는 영어 회화를 거의 못 했고,
학원에 다니긴 했지만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리는 수준이었다.
문법도 회화도 다 엉망이었다.
”한 마디만 해보세요.”
면접관은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수줍게 고개를 들고 말했다.
“My name is 김다은.
I’m 19 years old.
My favorite thing is calligraphy.”
(제 이름은 김다은 입니다.
저는 19살 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서예 입니다.)
그 말을 마치자, 면접관들이 고개를 또 끄덕였다.
웃는 얼굴도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에 걸렸다.
출결.
그게 자꾸 걸렸다.
찝찝하게 면접장을 나왔다.
보조가방을 손에 든 채였다.
그런데 나오는 순간,
같이 면접을 본 친구들이 내 앞에 우르르 몰려들었다.
“야 김다은! 니 진짜 말 잘하대.
우예 그래 말할 수가 있노?!”
한 명이 말하자, 다른 친구들도 덩달아 흥분했다.
내가 면접관 질문을 어떻게 받아쳤는지,
영어로 자기소개도 했다는 얘기를
면접장 앞에 서 있던 다른 애들한테까지 막 떠벌리기 시작했다.
그때 나,
그렇게 주목받는 애가 아니었다.
그래서 좀 창피했다.
‘얘들이 왜 이러나…’ 싶었다.
하지만 친구들은 진심이었다.
“야, 니 무조건 붙는다.”
“니 진짜 잘 하드라.”
“나는 말도 제대로 못했는데… 니 진짜 잘했다.”
한 친구는 자기가 떨어질 것 같다고 말하면서도
나만은 꼭 붙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 말들이 나를 들뜨게 했다.
“아이다, 내 출결 안 좋잖아…”
나는 자꾸 그렇게 말했지만,
속으론 조금씩 기대가 생기고 있었다.
‘나… 진짜 되는 걸까?’
집에 가서 엄마한테도 말했다.
“엄마, 친구들이 내 붙을 것 같단다.
근데 내 출결 진짜 안 좋잖아…
근데… 내 영어도 했다. 그냥 짧게.”
엄마는
“몰라. 기다려 봐라. 나오겠지, 뭐.”
그렇게 담담하게 말했지만,
나중에 들으니
엄마는 내 대학 보낼 각오까지 하고 있었단다.
“어차피 4년제는 못 가고 전문대 보내야 되겠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며칠이었는지, 한 달쯤 걸렸는지 잘 기억은 안 난다.
어느 날, 드디어 합격자 발표가 났다.
그리고 그 명단 안에—
‘김다은’
내 이름이 있었다.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
친구들이 그렇게 말했을 때도,
나는 스스로 확신하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진짜였다.
그 순간,
내 안의 자존감이 퐁 하고 부풀어 올랐다.
‘아… 나 해낸 거 맞구나.’
‘나 진짜 잘한 거였구나.’
그때 받았던 그 검정색 LG 보조가방.
나는 면접 본 날
그걸 집에 들고 가 엄마에게 드렸었다.
그리고 그 가방은,
엄마가 내가 회사에 합격한 다음날 부터 개시를 하셨다.
그 가방을 한동안 꽤나 자랑스럽게 들고 다니셨다.
나는 그 회사에,
당당히 합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