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반려동물 장례지도사 공부를 했다.
강아지 수시를 하고, 수의를 입히고, 입관까지 하는 연습이었다.
작은 몸을 닦고, 꼬리를 정리하고, 콧구멍과 귀에 탈지면을 넣어 분비물을 막는 절차들.
사람과 다를 바 없는 과정이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무겁지 않았다.
마네킹으로 사람 수시를 할 때는 공기가 묵직했는데,
강아지 인형을 다루고 있으니 왠지 귀엽고 앙증맞았다.
소꿉놀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웃음 끝에는 묘한 먹먹함이 따라왔다.
우리나라에서 1년에 죽는 반려동물이 백만 마리라고 했다.
그중 화장을 하는 경우는 20%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나머지는 생활폐기물처럼 버려지거나,
유기견 보호소에서 구조되지 못한 채 안락사된다.
작은 개들은 약값을 아끼려 목을 졸라 죽이고,
큰 개들은 수면제 없이 주사를 맞고 팔딱이며 죽어간다 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아까의 귀여움이 스르르 사라졌다.
죽음을 배운다는 게, 이렇게 잔혹한 현실을 함께 배우는 일이구나 싶었다.
이제 공부도 끝나간다.
요즘엔 장례비용, 우리나라 장례의 현실,
그리고 앞으로 바꿔야 할 문화 같은 걸 배운다.
외국에는 배울 점이 많은 문화가 많다.
떠나는 이를 예식처럼 기쁘게 보내주는 문화,
자연 속에 뿌려 다시 순환으로 돌려보내는 문화.
우리도 언젠가는 그렇게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이상하게, 배울수록 마음속엔 괴리감이 자란다.
사람 장례지도사 공부를 하며 들었던 이야기 때문이다.
무연고자의 경우, 가족이 인도를 포기하면
나라에서 70만 원에서 100만 원 정도를 지원해준다.
그 돈으로 관을 사고, 수의를 입히고, 화장을 하고,
작은 유골함에 담아 보낸다.
백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한 사람의 인생이 마침표를 찍는다.
그 이야기를 떠올리던 중,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얼마 전에 TV에 배정남 씨 반려견 보셨죠?
도베르만, 무지개다리 건넜다던데, 그 장례는 천만 원은 들었을 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상한 감정이 스쳤다.
어떤 사람은 백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생을 마치고,
어떤 강아지는 천만 원의 꽃밭 속에서 떠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고 배워왔는데,
현실의 죽음은 그렇게 평등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 사람의 죽음과 동물의 죽음을 동시에 배우고 있다.
그 사이에서 마음이 자꾸 흔들린다.
죽음을 배운다는 건 어쩌면,
이 세상의 불평등을 더 가까이서 바라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그 모양은 모두 다르다.
누군가는 꽃밭 속에서 떠나고,
누군가는 이름 없이 사라진다.
오늘은 그렇게, 한 생의 끝을 배우며
삶의 얼굴을 조금 더 또렷하게 본 하루였다.
그리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끝은, 몇만 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