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주말을 다들 이렇게 보내, 그러니까 죄책감 가질 필요가 없어
20대에 나는 집 밖으로 혼자서 돌아다니는 걸 무척 좋아했다. 혼자서 집 안에 있으면 무언가 기운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친구도 몇 없지만 그렇다고 만나서 수다를 떨고 유명한 맛집과 카페를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혼자서 서점을 가거나 그냥 정처 없이 길을 돌아다니거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서촌의 점보라면을 먹으러 가는 일이 내 유일한 외출이었다.
그런데 30대가 되고 보니 집에만 있는 것이 좋았다. 일부러 약속이 잡혀도 집에 있고 싶어서 약속을 취소하기도 했다. 심지어 약속 1시간 전까지 '제발 약속이 취소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한 적도 있었다. 집에서 내가 하루종일 하는 일은 밥 해 먹기, 영화 보기, 집 청소하기, 집 인테리어 바꾸기, 글쓰기가 전부였다. 그리고 저녁에는 항상 내가 좋아하는 안주에 술 한 잔을 곁들이며 하루를 마감했다. 나는 이런 나의 라이프 스타일이 참으로 만족스러웠다. 백수가 되고 바뀐 것은 없었다. 오히려 백수가 되고 더욱 철저히 나는 이런 나의 라이프스타일을 고수했다.
실제로 나는 이렇게 소파와 책상 앞에 앉아서 몇 시간씩 내가 꽂히는 영상 편집, 글쓰기,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매일매일 보고서와 제안서 혹은 화상회의를 위한 일들이 아닌 온전히 성과는 없지만 온전히 나를 위한,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해내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자발적인 은둔형 집순이이자 백수가 된 이후로 남자친구는 장거리인 우리 집에 자주 찾아와 주어서 애정전선에 문제가 없었는데, 연말을 맞이해 기꺼이 휴가를 쓰고 나와 3일을 내내 보낸 남자친구에게 나는 진정한 백수 생활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오전 9시, 늦어도 나는 10시면 기상을 해서 냉장고 속 반찬들을 보며 '오늘은 뭘 해 먹나' 생각하며 손수 밥을 짓는다. 그 과정이 꽤 번거롭긴 해도 나는 꽤 즐겁다. 집밥을 만드는 것에 꽤 단련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남자친구는 내가 깨울 때까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거의 12시 ~ 1시가 되어서야 스르스르 일어나는 남자친구는 나와 함께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바로 소파와 한 몸이 되어 눕는다. 그리고는 유튜브와 OTT 채널을 넘나들며 재미있는 콘텐츠를 발견하면 그대로 하루를 '순삭' 한다. 2일 정도 나도 남자친구와 똑같은 패턴으로 보내니 무언가 깊은 단전부터 찜찜함이 몰려왔다. 무언가 마감일이 정해져 있는 글을 써 내려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글을 안 쓰자니 찝찝했고, 책을 안 읽고 있자니 난독증이라도 생긴 듯이 머리가 지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잉여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갑자기 다운된 나를 보더니 남자친구는 '괜찮아'라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한 번도 주말을 침대와 소파에 한 몸이 되어서 보내본 적이 없다. 원래 그런 성향인 것인지 아니면 지금 내가 백수라서 오히려 그렇게 지내기보다는 빨리 당장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방도를 찾아야 될 것 같은 죄책감 때문인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회사를 다닐 때에도 나는 항상 책상 앞에 앉아서 일을 했고, 남자친구와 만나도 업무 이야기, 부동산 이야기, 세계 경제 이야기 등 애정 어린 연인 과의 대화는 아주 적었던 것 같다.
있잖아, 남들은 대부분 열심히 일하고 휴식을 가져, 그래야 충전을 하고 다시 일을 할 에너지를 얻지.
물론 그럼에도 돌아오는 월요병은 어쩔 수 없어. 그런데 너는 회사를 다닐 적에도 쉬지 않았어.
우리의 여행길에서도 너는 오는 회사 전화를 다 받고 해결해 주었잖아.
백수로서 정말 온전히 너의 휴식기가 주어졌는데도 이렇게 쉬어보지 못하면 얼마나 억울하겠어?
남들은 다 이렇게 쉬어봤는데. 며칠 이렇게 네가 쉰다고 하늘이 무너지지는 않아. 네가 망하거나 네가 가진 능력이 없어지지도 않아. 그러니까 한 번쯤 주어진 휴식기에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제대로 좀 쉬어봐.
남자친구의 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사내연애로 시작했지만 일을 하는 내내 라이벌이었고, 든든한 동료였고, 서로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그래서 서로가 어떻게 일을 하고 어떤 고충이 있었는지 누구보다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연인이자 친구였다.
물론, 사람마다 저마다의 '휴식'이 따로 있기는 하다.
나만의 휴식은 분주함과 그 속에서 정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고 남자친구의 휴식은 온전히 잉여 인간처럼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누구의 휴식 방식이 옳고 그르다 더 좋다 나쁘다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남들의 휴식을 나도 한 번 해본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게 발맞춰 하루쯤 잉여인간으로 살아도 좋다.
한 문장에서 쉼표를 찍는 건 더 나은 문장을 써 내려가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잠시 템포를 쉬고 마침표를 찍기 위해 나아가는 과정의 일부일 수 있다. 그 휴식이 길어진다고 조바심을 내진 말자. 어쩌면 그 휴식기가 길어질수록 당신은 열심히 쉼표하나 없이 문장을 이어왔다는 증거일 수도 있으니.
오늘 당장 소파와 침대에 내 몸을 맡기자. 온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휴대폰마저 꺼놓으면 더욱 좋다.
그리고 제일 먹고 싶었던 음식을 주문하고 밤을 새워도 좋으니 집중할 영화와 드라마를 준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