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문명 다이어트 시작하기

by 오흔

도대체 나 같은 사람은 어떻게 살라고 세상은 점점 복잡해지는 걸까?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 아니다. 이런 나의 단점을 나 스스로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회사에서 나는 최대한 메모와 캘린더 툴을 자주 사용하는 편이다. 다이어리, 태블릿, 노트북 내 메모앱 등 내 주변에는 메모와 기억을 리마인드 시켜줄 도구들이 가득했다.


기억력이 얼마나 취약한 편이냐면 어제 변경한 사이트의 비밀번호도 기억하지 못해서 다시 비밀번호를 변경하거나 혹은 비밀번호를 찾는 번거로운 수고를 하는 편이다. 머리가 나쁘니 몸이 고생하는 꼴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비밀번호는 최대한 내 손에 익은 그리고 기억하기가 쉬운 조합으로 만들지만 3개월, 6개월마다 [새로운 비밀번호 변경]에 대한 안내가 뜰 때마다 나는 절로 한숨이 나온다. 세상은 이런 나의 취약점과 단순함 때문에 내 개인정보가 유출될 거라고, 유출이 되었다고 조금 더 어렵게 겹겹이 나의 정보를 지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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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전야제로 2일 내내 동료들과 지인들과 퇴사파티를 하고 그 다음날 숙취에 사경을 헤매면서 내가 한 일은 바로 회사 메신저를 삭제하는 일이었다. 나는 기계치라서 포맷이나 초기화에도 취약한 편이다. 하지만 퇴사를 앞둔 회사에서 만큼은 이 부분을 정말 집중해서 작업을 하는 편이다. 그래서 개인 자료와 회사 자료를 정리하고 백업하고 초기화하는데에 나는 한 달 여가 소요된다. 그리고 마지막에서야 메신저 삭제를 하면 정말 끝 - 회사 메신저 앱을 지우고 보니 새삼스럽게 내 핸드폰에 설치되어 있는 이름 모를 그리고 언제 설치가 되었는지 모르겠는 앱들이 참으로 많다는 사실을 마주했다.


쇼핑, 음악, 다이어리, 편집, 명함, 클라이언트가 개발한 앱, 광고 심지어 나침반 앱과 실측'자' 앱은 언제 어떻게 설치해서 사용했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회사 메신저 앱 삭제를 시작으로 나는 천천히 내가 필요하지 않은 앱들을 정리했다. 앱들을 정리하니 자연스럽게 나의 다음 정리 순서는 주소록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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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6명] 고작 내 하루에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은 남자친구와 가족이 전부인데 언제 이렇게 많은 연락처들이 내 핸드폰에 담겼는지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터 인사치레로 명함을 주고받더라도 번호를 저장하지 않았던 날들이 더 많았음에도 내 핸드폰의 저장된 번호들은 넘치고 넘쳤다. 한 명 한 명 등록된 사람들을 찬찬히 살펴보니 이름이 적히지 않은 사람도 많았다. 마치 '문구 사장님'처럼 말이다. 어느 지점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게 적힌 정체 모를 번호들이 수두룩이었다. 기억을 되살려서 저장되어 있는 번호 중에 대다수를 지우고 또 지웠다. 그렇게 보니 70명. 이 마저도 추후의 '인연'을 생각해서 남겨둔 클라이언트, 선배, 동료가 대부분이었으니 실제 내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연락을 주고받을 사람들은 20명도 채 되지 않을 것 같다. 과거에 핸드폰에 등록된 연락처의 수가 곧 그 사람의 인기를 증명하는 척도가 되었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항상 비루한 내 연락망의 '숫자'는 나의 인기도를 대변하는 것 같아 주눅이 들곤 했다.


반나절을 꼬박 핸드폰을 정리하고 보니 왠지 가벼운 마음이 들었다. 불필요한 연락망, 불필요한 사진과 영상 그리고 앱들을 모두 내 몸에서 하나씩 떼어내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회사를 다니면서 '혹시 모를' 마음으로 남겨둔 기록들이 나의 발목을 계속 잡고 매번 나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주변을 둘러보니 나에게는 최신형 기기만 가득했다. 아이패드만 무려 업무용 개인용 2대, 노트북도 2대, 핸드폰도 2대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불필요한 문명의 기기들과 얼마나 함께해 온 것일까? 종이책 대신에 오프라인 책 그 마저도 짧은 영상으로 대체된 시대, 여행마저도 기록되는 삶, 요리의 귀찮음을 돈을 통해 편리함으로 대체할 수 있는 세상.


잠시 내가 가진 모든 문명들을 넣어두었다. 그리고 동네를 산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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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단지에 있는 놀이터에서 정말 오랜만에 쇠 냄새나는 그네도 타보고, 아파트 단지 한편에 조그맣게 언제부터 자리 잡았는지 모를 슈퍼에서 아주머니와 인사를 하고 우유를 사 먹었다. 늘 나에게 웃고 있으셨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심지어 늘 야근하고 돌아오는 나를 기억하고 계셨다. 항상 똑같은 시간에 할아버지와 함께 나온 천천히 산책하는 강아지가 처음으로 웰시코기가 아니가 백구라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분명 내 기억 속에 출근길 스쳐 지나간 아파트 담벼락은 개나리가 피었던 모습이었는데 어느 순간 눈으로 덮인 설야의 풍경을 다시 눈에 담았다. 오랜만에 활자 책 대신에 그림 동화책을 펼쳐놓고 읽었다. 아이패드의 그림 그리기 대신에 종이에 내가 그리고 싶은 낙서들을 잔뜩 했다. 살찔까 봐 혹은 귀찮다는 이유로 멀리했던 스팸 가득 넣은 김치볶음밥을 잔뜩 해 먹었다. 다이소에서 예쁜 쓰레기들을 하나하나 장바구니에 넣어 담아왔다. 소파에 가만히 앉아서 집안에 머무는 공기 소리를 들었다. 편지를 쓰고 싶은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다. 내 글이 정말 삐뚤삐뚤하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일기를 썼고, 내가 지금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노을 질 때까지 하늘도 하염없이 바라봤다.


심심했다. 적막했고, 무료했다. 무료하고 심심한 만큼 이상하게 마음은 참 편해졌다.

백수가 되었다는 건 어쩌면 잠시 문명과 멀어져도 괜찮은 시간이 주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얼마나 오랫동안 빠른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문명에 올라타 잠깐의 무료함도 허락하지 않았던 걸까. 좀 청승맞고 심심하면 어떤가, 지금이 아니면 문명 다이어트는 할 수 없다. 심심함 그리고 공허함 속에서 온전히 찾아오는 편안함을 느껴보자.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가도 좋고, 다시 중학생으로 돌아가도 좋다. 여행도 좋고, 동네 한 바퀴도 좋다. 대신 그 모든 걸 기록하기 위한 기록으로 나서지는 말자. 굳이 기록되지 않고 눈, 귀, 코로 남겨두는 시간도 지금은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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