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19
1) 유난 떨지 않는 마음
> 할머니와 살아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깐 마늘, 양파 등 까져있는 채소는 절대 사지 않는다. 다 우리가 다듬어야 한다. 가격도 이유지만, 직접 다듬어 먹는 게 몸에 더 좋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이다. 유치원생을 목욕시킬 수 있을만한 대아에 다듬어야 할 채소를 보면 “이거 언제 다하지.. 말도 안 돼”라는 생각을 매번 했다. 심지어 까면서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정말 다듬기만 한다. 시간은 왜 이리 안 가던지 속으로 자주 듣는 노래를 부르고, 온갖 잡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난 항상 중간에 도망가곤 했다. 그러다 한 번은 엄마에게 잡혀 할머니와 셋이 1시간 정도 걸려 모든 마늘은 다듬은 적이 있다. 마지막 마늘의 껍질을 까는데 이름 모르는 희열감이 나에게 찾아왔다. 끝마쳤다는 희열감과 비슷할 것 같다. 그 마늘을 까고나서부턴 도망가지 않고 항상 끝까지 할머니 옆에서 채소 다듬는 것을 함께 한다. 원래는 속으로 다른 생각도 하고 노래도 불렀지만, 그냥 채소 하나하나 다듬으며 우리 식구들이 먹는 거니 잘 다듬어야지, 할머니 일 덜 하게 내가 하나 더 해야지라는 생각 외의 딴생각도, 노래도 부르지 않았다. 그러다 보면 금방 다듬었었다. 채소를 빨리 다듬는 노하우는 유난 떨지 않는 마음이다. 하기 싫다며 유난 떠는 마음 필요 없이 그저 천천히 하나씩 해나가다 보면 그 끝이 있다는 것. 모든 일은 그렇게 해나가면 된다는 것. 내가 채소를 다듬으며 배운 것이다.
2) 다정한 고요
> 보통 할머니와 같이 티비를 보면 뉴스나 시사/교양을 틀어놓는다. 그러다 내가 정말 보고픈 방송이 있으면 나도 모르게 보고픈 방송으로 채널을 옮긴다. 랩 경연 서바이벌이었는데 2시간 정도 긴 시간이었다.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티비에 집중하여 티비를 보다 문득 할머니는 뭐 하지? 하며 고개를 돌리면 할머니는 나를 보고 있었다. 그제야 아차 싶었다. 그래서 빠르게 채널을 시사/교양으로 바꿔 틀었다. 그러면서 할머니에게 “할머니 심심했지, 미안”이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너 웃는 모습 보는 것도 재밌어”라고 말해줬다. 그 말을 듣고 알았다. 할머니에게 필요한 건 뉴스나 시사/교양 방송이 아니라 티비를 함께 볼 식구가 필요하다는 걸. 내가 할머니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단어가 계속 나오는 티비에 집중했을 때 할머니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건 적막한 침묵이 아닌 다정한 고요였다.
3) 할머니의 보폭
> 할머니를 모시고 어딜 놀러 가면 엄마는 코코(강아지)를 케어하고 나는 할머니를 케어한다. 할머니를 차에 태울 때 몇 가지 팁이 있다. 차에 탈 땐, 엉덩이를 살짝 받쳐 주면 할머니 무릎에 힘이 덜 들어간다. 그리고 차에서 내릴 땐 한 손은 차 손잡이에, 한 손은 내 손을 꾹 눌러 하중을 분산시켜 무릎에 힘을 덜 주도록 한다. 아 그리고 내리기 5분 전엔 할머니에게 무릎을 미리 움직이라고 언질을 해준다. 도착 후에 말하면 내려야 하는 조급해하는 마음에 무릎을 충분히 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할머니와 차를 탈 때의 팁이었다. 그렇게 목적지에 도착하면 할머니와 손을 잡고 경치를 제일 천천히 즐긴다. 나의 한 보폭이 할머니의 보폭에 5배 정도 될 것 같다. 그래서 할머니의 걸음에 맞춰 걷다 보면, 세상이 참 느리게 흘러가는 느낌이 든다. 그러면서 경치 구석구석까지 살피게 된다. 바다를 보러 갔다 하자. 원래의 나는 반짝반짝한 바다의 물결만 보았겠지만, 할머니와 걸을 땐 하늘의 구름, 기어 다니는 벌레, 뛰어노는 아이들까지 전부 보인다. 할머니의 걸음이 느렸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렇게 할머니는 나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