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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ena Sep 28. 2015

결국은, 사랑

어차피 이 사람은 나를 봐주지 않을 테니 이렇게 설레는 마음 따위 애초부터 갖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꾸 내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오는 웃음이라던가, 그 사람 때문에 내 마음이 부리는 변덕이라던가, 하는 것들을 참을 수 없어질 때쯤에는, 어차피 이 사람은 나를 봐주지 않을 테니 이 마음을 나 혼자 가진다 하더라도 문제될 것 없겠다고 생각했다. 이 마음들이 또 갈 곳을 잃고 헤맬까 무서워서, 매일매일 궁금해지는 당신의 내일이 수 천 번 반복된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의 내일이 나는 없을까 무서워서.

목소리가 참 좋은 사람이다. 나직하게 울리는 목소리로 괜찮다고 말해준다면 한없이 기댈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오묘한 눈빛을 가진 사람이다. 나를 꿰뚫어보는 듯 또 동시에 어린아이의 똘망스러움까지 지닌 그 눈빛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눈에 비치는 내 눈빛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아무래도 또 사랑에 빠지려나 보다. 또 품지 못할 무언가를 품은 듯 하다. 한 사람을 좋아하는 그 마음 자체가 또다시 죄악이 되어버릴 까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하여 그 자체가 서로에게 괴로움이 되어버릴 까봐. 이미 시작된 이것들을 어떻게 해야 아무도 다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어쩌면 누군가를 좋아해서는 안되는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문득 그들이 생각나 사진첩을 뒤적여 무섭기까지 한 그 얼굴을 찾아내었다. 남아공 워터프론트에 들렸다가 숙소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만났던 한 부부다. 나란히 삭발한 남자와 여자가 탑승했고, 나도 모르게 빤히 쳐다보았다. 다행히 그들은 내게 웃으며 인사해주었고, 우린 돌아가는 숙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그의 아내는 암환자였다. 항암치료 때문에 자꾸만 빠지는 머리카락들로 아내가 외출도 하지 않으려 하고 점점 그녀의 우울이 심각해지자 남편이 내린 결단은 실로 아름다웠다. 회사를 그만 두고 아내 옆을 지키는 것, 그리고 본인도 아내와 똑같이 삭발을 한 것. 그들의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아내는 정중히 거절했고, 그녀의 남편 역시 본인만 찍어달라며 포즈를 취했었다. 그의 그 표정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과 또 그녀를 지키기 위해 온갖 세상의 강함으로 무장한 어떤 결의가 단단히 느껴졌다. 그들은 내게 저녁을 대접하고 싶다고 했지만 나는 한사코 사양했다. 그들을 더 지켜보다 보면 내가 두 손 두 발 놓아버린 사랑이라던가, 영원이라던가, 하는 것들을 또 다시 믿고 싶어 질 것 같아서. 그렇게 그들과 헤어져 숙소로 걸어오는 길목에서 나는 가슴까지 벅차오르는 그 풍족한 사랑의 기운을 잊지 않고 언젠가 사랑이 내게 손짓하면 꼭 다시 꺼내보아야겠다 라고 생각했었다.

사랑에 빠지면 다시 한 번 믿어보고 싶어진다. 이번에는 나의 선택이 올바른 것일지도 모른다고, 이 사람은 내 진심을 적어도 외면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고, 아니 어쩌면 이 사람도 같은 마음일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꺼내 든 그 사진 속 남자는 이번에는 오묘한 표정이다. 그때처럼 그녀를 지키겠노라 결의에 찬 표정은 보이지 않고 글쎄, 하는 표정이 보인다. 마치 내게 마음 단단히 먹으라는 표정이다. 한 번 가봐, 오로지 너만 알 수 있을 거야. 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나는 나직이 대답한다. 글쎄, 여전히 내 사랑은 어렵고 나는 아직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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