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사람들이 자신의 힘듦을 얘기하는 건 그저 그걸 알아달라는 투정이고
정말 힘든 사람들은 자신의 힘듦을 얘기할 틈 조차 없기에 그 모든 투정들은 엄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지금 당장 힘들지 않은 사람, 아니면 힘들었던 시절이 지나간 사람, 그것도 아니면 힘들었던 시절을 잊은 사람들의 입장이고 지금 당장 힘든 사람들은 그렇지가 못하다.
문제나 고민 따위의 해결방법 보다는 그저 나를 쓰다듬어 주는 것만으로도 얻는 큰 위로.
그저 그거면 되는데 애석하게도 사람들은 대부분, 그리고 나 역시 쓴 소리로 위로를 대신한다.
호주로 워킹홀레데이를 떠난 친구가 있었다.
그 때, 그 친구는 나에게 알게 모르게 많이 의지를 했던 것 같다.
가끔씩 오는 연락은 온통 힘들다, 외롭다 라는 말들이었고 나는 역시나 그 친구가 지금 정말 힘든 게 아니라 그저 투정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진짜 힘들다면 나한테 연락을 할 여유조차 없을 거라고, 그저 조금의 힘듦에 엄살을 부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오만하게도,
지금 그거 하나 견디지 못하면 여기 와서 니가 뭘 할 수 있겠니, 힘들어도 힘내라, 그 일을 겪어보지 못해서 내가 제 3자라서 할 수 있는 말이니 서운해 하지 말아라,
따위의 위로 아닌 위로를 했었다.
그 친구에게 찾아왔던 힘듦과 외로움이 케냐에 있는 내 마음에도 노크를 했다.
그들에게 외국인인 나,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마음들, 아무리 친구를 사귀어도 내 친구 같지 않은 거리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혹은 그 어떤 것을 해도 늘 외로웠던 밤까지.
그때서야 나는 내가 내뱉었던 그 말들이 얼마나 이기적인 위로였는지를 알았다.
그녀의 힘듦을 엄살로 치부했고,
용기 내라는 취지 따위로 안 그래도 전부 상처인 그녀의 마음을 후벼 팠던 거다.
그렇게 힘들면 그만 두고 돌아와, 나는 언제나 너의 선택을 믿어, 왜 거기까지 가서 힘들고 그래,
따위의 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내가 멈추지 않았듯 그 친구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 말에 더 힘을 내 버티려고 마음 먹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 때 그 친구의 힘듦을 진심으로 믿었다면 나 역시 그녀에게 그랬으리라.
힘든데 왜 거기에 있어, 얼른 한국 와, 보고 싶어.
그 친구에게 너무 미안해져서 사과의 메시지를 보냈다.
경솔해서 미안했다고, 지금 내가 딱 그렇다고, 그 때의 내 말들이 얼마나 쓸데없는 말들이었는지 이제야 안다고.
내 입장에서 힘들 게 전혀 없는 일이라고 해서, 내 입장에서 누군가의 힘듦이 엄살로 보일지라도,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결코 엄살일 수 없었던 거다.
정말 힘드니까 자기 마음을 알아달라고 투정도 부릴 수 있는 거였다.
표현하는 사람에 따라, 또 표현하고자 하는 힘듦의 무게에 따른,
투정이든 침묵이든 그건 모두 힘듦의 다른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