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치료 일기 + 살아 있는 날들의 기록
2026년 2월 28일 토요일 흐림
오늘 감정 점수: 4
몸 상태: 4
떠오른 생각: 마음이 파도에 휩쓸려 내려가는 기분이야.
주말, 조금 일찍 일어난 날에는 등산 준비를 한다. 집 근처 산은 이미 올라가봤으니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면 가는 산으로 정했다. 버스에서 내리려고 뒷문 앞에 섰더니, 누군가 뒤에서 나를 두드린다. 뒤돌아보니 엄마였다.
"어디서 많이 보는 애가 있다 했다. 어디 가노?"
"산에."
"엄마는 어디 가?"
"엄마는 모임에."
우리는 서로 잘 갔다 오라는 인사를 남기고 헤어졌다. 가끔 시트콤 같은 일이 생긴다, 우리 가족은.
어릴 적에 종종 찾던 산이라 길을 잃을 걱정은 크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예전보다 많이 변해 있었다. 벤치가 여기저기 늘어나 있었고, 붉은귀거북이가 가득했던 호수에는 잉어와 오리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예전에는 산 중턱 약수터까지만 갔었지만, 오늘은 정상으로 가는 거라 중간에 방향을 틀었더니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 나왔다. 눈앞에 보이는 길로만 가다가 지도 앱을 켜니 정상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다시 꺾어지는 쪽으로 오니 돌이 쌓인 벽 뒤로 올라가는 길이 나 있었다. 그리고는 또 별생각 없이 눈에 보이는 길을 따라 갔더니 정상석은 보이지 않는 정상이 나왔다. 봉수대라서 정상석이 없나 보다 했는데, 지도 앱을 다시 켜보니 올라온 반대 방향으로 1km 남짓 더 가야 정상이라고 떴다.
중간중간 지도 앱을 확인해야 하는데, 매번 길을 잃으면서도 감을 믿는다. 그런 내가 싫지도 않고,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짜증나지도 않는다. 어떻게든 도착하면 되니까. 지도 앱을 손에 들고도 항상 길을 잃어버리는 내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올라가는 길에서는 땅만 보고 바위 하나, 계단 하나씩 밟아가면 정상에 닿는다. 고개를 숙이고 걷다 보니 마음이 쪼그라들어 땅으로 꺼질 것만 같다. 그럴 때는 숨을 다시 고르고, 풍경을 바라본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나무들이 자라는 숲은 고요하면서도 소란스럽다. 정상으로 가는 길에 나뭇가지에 몸을 둥그렇게 앞으로 말고, 떨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잠을 자고 있는 청설모를 봤다. 나무 굴 같은 것을 찾기 어려웠나 보다.
'너도 혼자구나. 나도 혼자야.'
다시 산을 오른다. 정상에 도착하니 나무들이 산 아래를 가리고 있어 정상이라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정상석만 덩그러니 공터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반대쪽 봉수대에서는 바다까지 다 보였는데. 텀블러에 핸드폰을 받쳐 두고 혼자 기념 촬영을 한다. 정상 정복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뭔가 해냈다는 기분은 든다. 한겨울 한라산을 가고 싶어서 체력 단련 겸 시작한 등산이 어느새 일주일 루틴으로 자리 잡았다. 다음 산은 어디로 갈까.
by 희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