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공존시대, 메타인지 키우는 법
챗GPT의 등장과 함께 많은 이가 충격에 빠졌다. 누군가는 이 사건을 두고 인류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표현했다. 나 역시 가벼운 마음으로 체험해 보았다가 이내 소름이 돋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헛웃음마저 나왔다. 챗GPT의 글쓰기 아웃풋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신기술, 그 너머가 두렵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방송작가란 직업도 사라질 거란 불길한 예감과 함께 10살 아들을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도 마음이 무거워졌다.
안타깝게도 우리 아이들이 챗GPT보다 글을 잘 쓰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방대한 자료의 학습을 마친 이 녀석은 인간이 말하는 속도, 생각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글을 쓴다. 마치 사진을 찍듯 ‘펑’ 하고 나타난 문장들은 심지어 논리적, 구조적으로 아주 완벽하다. 전문가 수준의 글쓰기뿐 아니라 학습 수준별 페르소나 글쓰기까지 가능하다. 이를테면 ‘초3 수준’으로 조선시대의 이동 수단에 대한 글쓰기를 요청할 수 있다. 아이들은 챗GPT로 숙제를 ‘외주화’하는 유혹을 벗어나기 힘들 것이고, 선생님은 글쓰기의 주체를 구분하기 힘들 것이다. 결국 학교에서 글쓰기 숙제가 사라질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 아이들에게 글쓰기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 걸까? 절대 아니다. 오히려 AI와 함께 살아갈 우리 아이들에게 글쓰기는 더욱 중요해졌다. 인류가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세상을 살아갈 우리 아이들에게 나는 방송작가의 글쓰기를 추천한다.
흔히 방송작가라고 하면 드라마작가를 먼저 떠올리기도 하는데 사실 방송작가의 절대다수가 예능, 교양, 시사. 다큐 프로그램 등을 제작하는 구성작가이다. 나는 19년간 방송작가로 일하며 건강과 청춘을 잃었지만, 얻은 것도 많다. 여러 분야의 전방위적 아이템을 방송으로 만들며 그 안에 담긴 정보와 지혜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것은 삶에서 만나는 크고 작은 관문들의 출입카드가 되어주었다. 캠핑 아이템으로 방송을 한 번 하고 나니 첫 캠핑에서도 당황할 일이 별로 없었고, 요리 프로그램을 하며 요리실력도 늘었다. 아이를 낳기 전 육아 예능 프로그램을 진행한 것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렇다면 방송작가의 글쓰기란 무엇이 다를까?
방송대본이 완성되는 순서와 함께, 이것이 왜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지 이야기해 보려 한다.
방송작가는 필연적으로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지 못한다. 내가 맡은 프로그램에 적합하면서도 방송국이 원하는(시청률에 도움이 되는) 아이템을 찾아 글을 써야 한다. 학교에 다니는 우리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레고 조립설명서나 공룡 학명만 파고들 순 없다. 학년에 적합한 수준으로 교과과정에서 걸맞은(시험을 잘 볼 수 있는) 공부를 해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 아이들도 방송작가처럼 어떤 과목이든 글쓰기 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좋아하는 과목의 아이템이 선정되면 신나게 글쓰기를 다져갈 것이고, 어려워하는 과목의 아이템이라면 글쓰기를 통해 더 잘 알아가게 될 것이다.
아이템이 정해지면 방송작가는 그것과 관련한 자료조사를 해야 한다. 그래야만 다음 단계인 섭외 및 취재 과정에서 전문가에게 적절한 질문을 하고, 돌아오는 대답을 알아들을 수 있다. 아이들도 주제에 맞는 글을 쓰려면 반드시 자료조사가 필요하다. 그 분야에 대해 스스로 잘 알지 못하면 단 문장도 제대로 쓸 수 없다. 전문가가 될 각오로 몰입해 빠삭해져야 한다. 평상시 하는 교과목 공부가 글쓰기의 자료조사라고 생각하면 한결 더 흡수가 빨라진다. 글을 쓸 목적으로 공부(자료조사)하면 중요한 키워드, 전체 맥락을 절대 놓치지 않게 된다.
자료조사를 통해 어느 정도 주제에 대한 파악이 되면, 관련 분야의 전문가를 섭외한다. 연락을 취해 방송 출연을 제안하거나 자료조사로 얻지 못한 더 깊은 정보를 얻기 위함이다. 요즘은 전문가들이 운영하는 유튜브나 블로그가 참 많다. 이곳에서 원하는 양질의 정보를 충분히 얻을 수 있다. (실제 유튜브로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전문가를 취재해 보면 유튜브 영상과 거의 비슷한 내용을 이야기할 때가 많다) 우리 아이들 역시 글쓰기를 할 때 선생님과 부모님에게 질문하고, 관련 전문가의 유튜브 영상을 찾아본다면 더 입체적인 내용을 담을 수 있다. 글쓰기가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1) 구성의 기술
자료조사에 전문가의 육성과 정보가 더해지면, 대본을 어떤 흐름을 가져가야 할지 가닥이 잡힌다. 이제 전체 영상의 틀을 잡는 구성이 시작된다. 재미있는 내용, 중요한 내용을 어디에 배치할 것인지, 가장 효과적인 순서를 찾아 원고를 쓴다. 이 구성대본은 촬영 현장에 나가는 PD에게 내비게이션과 같은 존재다. 주행 방향(주제와 질문내용)은 물론 목적지까지 남은 시간(전체 영상분량), 속도 단속카메라(ex. 민감한 일반인 출연자)처럼 조심해야 할 부분도 알려준다. 아이들은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쓰다 엉뚱한 결론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 글의 방향과 분량을 정하는 탄탄한 구성 연습이 이루어지면 문장 속에서 헤매는 일도 줄어든다.
2) 메타인지 글쓰기
방송원고의 가장 중요한 점은 누구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쓰여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만 이해하고 알아보는 방송대본은 좋은 대본이 아니다. 스스로 알아낸 정보를 모두가 이해할 수 있게 정리하는 메타인지 글쓰기가 이뤄지면 그 내용은 쉽게 휘발되지 않는다. 뇌의 장기기억 폴더에 저장되어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진짜 나의 것이 된다. 나 역시 대본을 쓰며 알게 된 지식이 초중고 내내 쌓은 것보다 훨씬 더 많다. 역사 프로그램을 하면서 새롭게 학습한 내용이 많은데(분명 국사 시간에 분명 배운 내용이다) 메타인지 글쓰기를 한 덕분에 상당수 내 머릿속에 저장되었고, 기회를 봐가며 아들에게 전해주곤 한다.
3) 페르소나와 소통
스튜디오 녹화까지 진행될 경우, 작가는 전체 흐름을 잡아가는 MC의 멘트와 윤활제가 되어주는 패널들의 멘트를 쓴다. 시청자들이 궁금증을 해결해 줄 전문가(게스트)의 멘트도 정리해 나간다. 그러기 위해선 여러 사람의 페르소나를 사용해야 한다. 타인의 입장이 되어보는 이 과정에서 글쓰기는 물론, 소통의 본질을 배워간다. 학교에서 인기 많은 친구는 대부분 눈치와 센스가 탁월하다. 방송작가식 글쓰기 훈련을 하면 우리 아이도 인싸가 될 수 있다.
1) 더빙
프로그램 특성에 따라 편집한 영상에 내레이션을 얹는 경우도 있다. 이때 작가는 영상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더빙 대본을 쓴다. 이 과정에서 수없이 화면을 돌려보고 의미를 부여해 본다. 장면을 살리는 적합한 단어를 찾는 것도 생각보다 쉽지 않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영상이나 게임에 내레이션을 입히듯 대본을 써본다면 어휘력 확장에 큰 도움이 된다. 유튜브 꿈나무라면 이런 글쓰기가 확장되어 전문성을 갖게 될 것이다.
2) 자막
영상에서 꼭 알고 넘어가야 할 정보나 핵심적 내용을 간결한 문장으로 정리해 주는 자막 작업은 방송작가 글쓰기의 최종단계라고 할 수 있다. 아이들이 직접 쓴 글이나 교과서의 내용을 스스로 자막 뽑듯이 요약해 보는 것도 좋다. 긴 글을 요약하려면 그 내용을 완전히 이해해야 하므로 여러 번 복기하게 된다. 어려운 단어는 정의를 찾아 설명박스 자막으로 표현해 보고, 쉽게 이해되지 않는 개념은 유행어를 이용한 예능적 자막으로 정리해 보면 즐겁게 익힐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아는 방송작가들은 대부분 잡학 다식하고 공감 능력이 뛰어나다. 아마도 앞서 소개한 형태의 글쓰기를 수없이 했기 때문일 거다. 연차가 쌓이면 쌓일수록, 어떤 분야의 사람과 만나도 매끄럽게 대화가 가능하다. (MBTI 크게 중요하지 않다) 뉴스나 영화에서 다뤄지는 전문 분야도 어느 정도 맥락을 짚어갈 수 있다. 한마디로 세상과 삶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진다. 우리 아이들이 방송작가처럼 글쓰기 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성적을 잘 받기 위해서도 작가가 되기 위해서도 아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스스로 공부하고 이해해서 견뎌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꿈은 무엇이고, 사람들과 어떻게 더불어 살아가야 할 것인지… 모든 것을 챗GPT에게 물을 순 없다. 그러나 우리는 글쓰기를 통해 인생의 많은 답을 스스로 찾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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