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업무의 8할은 설거지였다
커피를 좋아한다면 누구나 한 번쯤 나만의 카페를 차리고 싶다는 꿈을 꿔보게 된다. 나도 향긋한 커피 향이 가득하고 감미로운 음악이 흐르는 곳이 내 일터라면 어떨까? 그곳에서 책도 읽고, 지인들을 언제든 초대해야지. 이런 판타지에 가까운 생각을 자주 했었다. 이런 습관성 망상 때문이었을까? 휴식기가 찾아오자 자연스럽게 바리스타 자격증 학원에 등록하게 되었다. 주 3회, 수없이 에스프레소를 내리고 우유스팀을 뿜어댄 끝에 드디어 2급 바리스타 자격증을 손에 넣었다. 그러자 이번엔 카페에 취직하고 싶어 졌다.(당장 카페를 차릴 재력이 나에겐 없었기에) 여러 곳에 이력서를 넣고 몇 곳에 면접을 본 후, 집 근처 카페에서 일주일에 2~3번 일을 하게 되었다. 그땐 몰랐다. 내가 카페에서 주로 해야 하는 일이 설거지였다는 것을.
내가 일하는 곳은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도 아니고, 유동인구가 많지 않은 곳에 위치해 손님들이 드문드문 찾아온다. 그래서 거의 매장에서 혼자 일을 한다. 어쩌다 한 번씩 우르르 단체 손님이 방문하면 내 등줄기로 긴장의 전류가 흐르기 시작한다. 4명 이상의 손님들이 각자 다른 음료를 주문하면 일단 제조에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하고, 설거지거리도 너무 많이 나온다. 어떤 음료는 한 잔 만들고 나면 설거지거리가 잔뜩 쌓이기도 한다. 얼음을 넣어 곱게 가는 블랜더가 1대 이기 때문에 다양한 종류의 스무디 주문을 받으면 제조-설거지-제조-설거지 싸이클을 계속 반복해야 한다. 게다가 테이크아웃이 아니면 손님들이 돌아간 뒤, 주방은 거의 초토화 상태다. 바리스타 학원에서 우아하게 커피 향을 맡으며 에스프레소나 내리던 때와는 차원이 다른 노동이 펼쳐진다. 그야말로 설거지옥의 문이 열린다.
그런데 이 설거지... 나쁘지 않다. 우선, 집에서도 늘 하는 일인데 여기서는 돈을 받고 한다. 집에서는 식기세척기의 보조를 받긴 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해야 하는 고된 가사 노동일뿐이다. 더 억울한 건 왜인지 모르지만 설거지는 늘 내 몫이다. 어쩌다 남편이 설거지를 하면 고맙다는 말을 해줘야 한다. 반대로 내가 설거지를 하면 누구도 고맙다는 말을 해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누가 시급을 챙겨주는 것도 아니다. 돈을 받기는커녕 식기세척기를 돌릴 때마다 전기세를 지불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카페에서 하는 설거지는 왠지 즐겁다.
카페 업무는 예상밖으로 설거지가 8할이었지만, 집에서 하던 설거지와 다르게 약간 힐링이 되기도 한다. 오히려 손님이 없어 지루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음료 주문이 계속 들어오고, 설거지가 왕창 쌓이면 기분이 좋다. 참 희한하다. 같은 일도 상황에 따라 의미도, 감정도 크게 달라진다. 이제 집에서 설거지를 할 때마다 남편에게 시급을 요청해야겠다. 그게 아니라면 설거지를 남편에게 시키고 내가 시급을 지급해야겠다. 네 돈이 내 돈이고 내 돈이 네 돈인 우리 집이지만, 설거지 시급제도를 도입한다면 서로 설거지를 하겠다고 나설지 모른다. 아, 이것도 나의 헛된 망상이려나...
#글루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