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희 Oct 01. 2018

여행이 시작되는 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출발


낯선 곳으로 떠나는 날의 설렘과 묘한 긴장감


 여지없이 이른 아침 비행기를 선택했다. 하노이 때처럼 공항 근처의 카페에서 밤을 새울까, 하다가 집에서 몇 시간이라도 자기로 한다. 여행을 떠날 날이면 소풍을 앞둔 아이처럼 쉽게 잠에 들지 않는 밤을 맞이하곤 했다. 그렇지만 요사이 쌓인 수면빚이 상당했는지 그날따라 빠르게 잠에 들었고, 또 그보다 더 빠른 느낌으로 알람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세 시간만의 기상은 상쾌하진 않았지만 여행을 앞둔 때 그 특유의 긴장과 함께 생기가 돌았다.


 아직 빛이 채 닿지 못한 새벽 5시의 어슴푸레한 하늘.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지 않은 듯한, 밤의 연장선상에 있는 그 시간의 대기는 어딘가 야릇하다. 이맘때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서며 여행이 시작됨을 실감하는 순간은 변함없이 강렬한 기억으로 남곤 했다. 홀로 떠나는 사람이 결코 볼 수 없는 모습, 마치 새벽빛 아래 여행길에 오르는 여행자의 뒷모습을 보기라도 한 듯 그 장면은 여행 필름의 한 칸을 채운다. 몹시 피로하지만 또렷이 맑은 새벽, 그 고요함. 출발보다 빠르게 다가오는 아침의 그림자 같은 것들과 함께.


떠나던 날의 새벽

 

 공항에는 세계 각국으로 떠날 사람들이 모여 있다. 홀로 이륙을 기다리기 무료해 주변을 살펴본다. 어쩐지 지난겨울에 동남아 여행을 다녀올 때보다 비엣젯 항공의 규모가 커진 듯하다. 베트남은 최근 들어 관광지로서의 인기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하노이와 다낭을 다녀온 나 역시 누군가 베트남 여행에 대해 물으면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으니, 비엣젯 항공에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풍경이 십분 이해가 됐다. 후쿠오카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좌석에도 눈에 띄게 사람들이 많다. 일본은 두말할 필요 없이 꾸준히 사랑받는 여행지다. 이런 공항의 풍경은 언젠가 더 다양한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과 여행에 대한 설렘을 품게 만들곤 한다.


 나의 목적지인 블라디보스토크 역시 앞선 나라들보다는 규모가 작았지만 꽤나 많은 사람들이 수속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까운 거리에 짧은 휴가를 보내기에 좋고, 아시아권에서는 사뭇 다른 문화를 지닌 곳인 만큼 앞으로도 꾸준히 여행 수요가 있을 것이다.


 비행기는 곧 활주로를 달렸다. 육지에서 떠오르는 그 찰나의 느낌을 포착하기 위해 이륙까지는 눈을 감지 않았다. 잠시 후 비행은 순식간에 구름 사이에 도달해 있다. 그렇게 보이지도 않을 만큼 한국 땅이 멀어지고 나면, '진짜 시작이다'라는 생각과 함께 잠을 청한다. 잠을 설친 출발 전날에서 이어지는 하늘 위의 쪽잠도 여행의 빠질 수 없는 요소 중 하나가 아닐까?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비행기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두 시간쯤은 잠을, 한 시간쯤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다가 금세 블라디보스토크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곧 혼자 여행을 가서 이방인이 될 것이라는 설레발이 발동했었는지, 출국 직전에 서점에서 고른 책이 그것이었다. 무게가 많이 나가지 않는 얇은 책이었기에 습관처럼 한 권을 챙겼지만, 사실 여행만큼은 독서를 반드시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새로운 곳을 탐험하는 여행이 곧 책을 읽는 일과 비슷한 성격을 많이 지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행지에서 여유롭게 독서를 하는 시간을 그려보면 그 또한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라 매번 한 권씩은 챙기게 된다.


 블라디보스토크의 크네비치 국제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12시 30분이었다. 부산에서 8시에 출발했으니 세 시간 반이 걸렸다. 이곳의 표준시는 한국보다 한 시간이 빠르다. 공항에서 주기가 잘못되는 바람에 꽤나 늦어졌는데, 열차 시간에 맞추어 공항철도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의 중심부로 이동하려던 계획이 무산됐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종착역이라는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을 구경하며 시작하려던 일정도 물거품이 됐으니 시작부터 조금 꼬인 셈이었지만, 나는 그런 것은 별로 개의치 않는 편이다. 여행이야 어디로 향하든 즐거움이 있을 테니.


 공항에서 마주한 블라디보스토크의 첫인상은 다소 조용하고 한적했다. 러시아라는 나라가 풍기는 이미지가 있다 보니 입국 수속을 밟을 때는 꽤 긴장이 되기도 했지만 딱히 인상적인 일은 없었다. 크네비치 공항은 생각보다 작았고 밖으로 나가도 눈에 띄는 시설이 없어서 한적한 시골 느낌도 들었다. 그럼에도 황량함보다는 하늘이 높고 날씨가 몹시 쾌청해서 오히려 상쾌한 기운이 넘쳤다.


 기차를 놓쳤으니 버스를 타야 했다. 러시아의 우버라 불리는 택시 앱 막심(maxim)이 편리하다고 해서 미리 설치해두었지만, 혼자 여행하는 입장이라 택시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다행히 공항 외부로 나오자마자 새까만 밴을 한 대 발견했다. 흔히 떠올리는 버스보다는 많이 작았지만 공항과 시내를 이어준다는 107번 버스가 분명했다. 드넓은 도로 위에 있어서 더 아기자기해 보이는 차량에 탑승하니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벌써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기껏해야 열두 명 정도를 수영할 수 있는 그 미니밴은 금세 만석이 됐고 그러자 즉시 시동이 걸렸다. 여행자들을 실은 차량은 곧 느린 멜로디의 러시아 가요와 함께 시원하게 블라디보스토크를 달렸다.



블라디보스토크 국제공항, 107번 버스


 시원한 바람에 머리칼이 날린다. 러시아, 낯선 곳이라는 긴장감은 차창 밖의 광활한 들판으로 바람에 실려 날아가고 새로운 여행에 대한 기대는 조금씩 그 자리를 넓혀간다. 앞으로 일주일은 완전한 자유였다. 아무런 의무나 해야 할 일 따위는 없는 7일이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동안이라도 복잡한 일들은 모두 잊고 발이, 마음이 가는 데로 살 수 있을 것이다.


'모두 잊고'


 그래. 어쩌면 우리는, 찰나의 생에서 잠시라도 자유로이 원하는 길을 따라 걷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것은 아닐까.


작가의 이전글 왜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