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희 Oct 03. 2018

블라디보스토크의 끝자락에서

여행을 사랑할 수밖에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한 육지가 마침내 끝나는 지점에 도착했다. 서너 명의 사람이 겨우 함께 걸을 수 있을 만큼 폭이 좁아지는 곳에 서자 양옆에서 부서지고 있는 파도가 느껴졌다. 블라디보스토크가 자랑하는 짙푸른 색바다의 진가를 가장 가까이서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이곳은 토카렙스키 등대다.


등대로 가는 길



블라디보스토크의 끝자락


 토카렙스키 등대(Mayak Tokarevskiy)는 한국인 여행자들에게 '마약 등대'라는 이름으로 더욱 친숙하지만 러시아어 '마약'은 등대라는 뜻이므로 마약 등대는 번역하면 '등대 등대'라는, 다소 우스운 의미가 된다. 육지와 접하는 이곳의 바다를 토카렙스키 만이라 해서 러시아인들은 그 이름을 따 '토카렙스키 마약'이라 부르며, 또한 탐험가 구스타프 에게르셀드의 이름을 따서 '에게르셀드 마약'이라 부른다고도 한다.


토카렙스키 등대


 커피나 해산물을 파는 식당들이 있는 해안가 입구에서부터 등대까지는 꽤나 큰 면적의 육지가 이어진다. 왼쪽에서는 세찬 파도가, 오른쪽에서는 아주 잔잔한 파도가 치는 길을 따라 걷는다. 따듯한 햇살 아래 푸른 바다의 풍경과 함께 양쪽에서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걸으니 순식간에 땅의 끝자락에 닿아있다. 파도가 치는 바닷길 건너편에는 하얀 원기둥에 새빨간 모자를 쓴, 아리따운 모습의 토카렙스키 등대가 나타났다.


 물이 빠지는 시간을 잘 맞추어오면 등대까지 이어지는 육지가 드러나기 때문에 등대가 세워져 있는 자그마한 땅덩어리까지 발이 젖지 않고도 걸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이곳을 찾은 오후 세 시경에는 그 길에 바닷물이 가득 차있었다. 이 진풍경을 두고 당장 돌아갈 연유가 없었기에 우선 물길에 발을 담그기보다는 근처의 커다란 바위로 향한다. 가까이에 파도가 부서지면서 조금씩 튀는 차가운 물방울들이 왠지 싫지 않다.


 뒤편으로는 루스키섬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루스키교를 중심으로 도시 중심부의 전경도 보인다. 그리고 그 반대쪽은 고고히 떠있는 섬들만이 침묵하는 망망대해가 펼쳐져 있다. 잠시 머리를 비우고 나의 모든 감각을 이곳을 채우는 요소들에 집중해본다. 엇박자로 들려오는 파도소리, 더없이 맑고 높은 블라디보스토크 9월의 하늘과 그보다 더욱 푸른 바다, 외로운 듯 강직하게도 서있는 등대와 그 주변을 날아가는 갈매기들, 바다의 그 냄새까지. 마치 세상의 끝에 와있는 듯한 기분이다.




바다를 건너며 맞이한 노을


 근처의 옥토퍼스 카페(Octopus Cafe)에서 잠시 시간을 보낸 후 노을이 지는 시간에 맞추어 다시 토카렙스키 등대를 찾았다. 좋은 풍경에는 또 커피가 빠질 수 없으니 입구의 '꼬꼬 커피'에서 아메리카노를 하나 사본다. 어린아이들이 낙서로 그리는 2차원 집처럼 생긴 그 가게의 간판은 러시아어로만 되어있어 정확한 이름을 알 수 없었다. 다만, 지붕엔 늑대인지 개인지 하는 동물이 닭과의 추격전을 벌이고 있어서 자체적으로 그리 명명했다. ‘늑대 커피’가 좀 더 멋있긴 하지만 눈물을 흘리며 도망치고 있는 불쌍한 닭을 위해.


 느긋이 걷기를 십 분여, 다시금 끝자락에 도착했다. 고운 등대로 이어지는 길은 여전히 바다로 막혀있었다. 무리해서 들어갈 필요야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보는데 갑자기 내 또래의 러시아인들 몇 명이 신발을 벗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대로 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파도가 닿을 듯 말 듯 한 자갈 위에는 그들이 벗어 던진 신발만이 남겨져 있었다.


 물이 무릎 아래까지 찰만큼 길이 열리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한 팀이 시작을 끊으니, 근처에서 지켜보던 이들도 용기를 얻었다. 하나 둘 신발을 벗기 시작하더니 짙푸른 바다로 걸음을 옮겼다. 마치 '내가 가는 곳이 길이다'라고 외치는 듯한 발걸음들이었다. 배낭을 메고 있어 바다를 건너기에는 다소 몸이 무거운 여행자였던 나는 잠깐 고민에 빠졌지만 이내 결심을 내렸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땅끝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가기는 자못 아쉬웠다. 신발을 벗고 발목 양말을 돌돌 말아서 신발 깊숙한 곳에 구겨 넣었다. 양말이 바다에 빠지면 곤란하니까. 그리곤 회색, 갈색, 붉은색 자갈로 구성된 천연 지압판 위를 이따금씩 '아!' 소리를 내뱉으며 조심스레 걷기 시작한다.


 워낙에 색이 짙어서 몹시 차가울 것 같은 느낌을 풍기던 바다의 온도는 생각보다 견딜만했다. 한 손엔 신발을, 다른 한 손엔 셀카봉을 들고 영상까지 촬영하며 바닷길을 건넌다. 양쪽에서 치는 파도가 밖에서 보기보다는 거칠어서 몇 차례 휘청거리기도 했지만 큰 어려움 없이 물속을 걸을 수 있었다. 중간지점쯤이라고 생각했을 때 허리를 쭉 펴고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본다. 이곳 땅끝 등대 앞에서 감상하는 블라디보스토크와 동해바다의 노을은 언제나 장관이었지만 물속에 발을 딛고 느끼는 일은 그 깊이가 다른 차원이었다. 마치 지금 바다 위에 서 있는 나 또한 그 풍경의 하나가 되어 있는 것만 같다.

 

맨발로 바다를 건너고


 예상치 못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면 등대 부근에서는 맨발로 불가사리 같은 것들을 밟으며 지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이 찼다가 빠지는 곳이다 보니 알 수 없는 해산물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다. 나는 다시 육지로 돌아오는 길에 아주 거대한 불가사리를 하나 밟았는데 물컹거리는 징그러운 촉감과 달리 피부가 고운 보라색이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천천히 5분가량을 걸으며 등대로 가던 그 순간의 물결과 바람은 무척 시원했다. 마침내 등대에 도달했을 땐 바지의 아랫부분이 다 젖어있었고 돌아가기 위해선 또다시 물을 건너야 하겠지만 그 대책 없음에 오히려 모든 스트레스가 휘발하는 듯 짜릿했다. 집으로 돌아갈 길이 멀어도 잠시나마 모든 걱정을 잊고 등대 앞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대로 한참을, 블라디보스토크의 푸른 바다로 노을이 지는 것을 지켜본다. 따스한 석양 아래 카누를 타고 노를 저으며 항해하는 사람의 모습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쳐 지나간다.




 

 노을이 지는 토카렙스키 등대, 그곳에는 여행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여행이 시작되는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