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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희 Oct 19. 2018

여행의 밤, 게스트 하우스의 추억

그 혼란스러운 밤의 메아리


높은 언덕 위의 작은 집, 넵튜니아


 여행을 준비할 때 숙소 예약에는 크게 우선순위를 두지 않는 편이다. 좋은 숙소를 구하는 일이 여행에서 너무나 중요한 요소라는 것에 공감하지만, 경험상 각종 앱을 이용해 미리 알아본다고 한들 넘쳐나는 숙박업체를 보며 고민만 쌓일 뿐이었다. 이번에도 한참을 미루다가 출발 약 일주일 전, 에어비앤비 앱에서 계속해서 해당 날짜의 예약이 급증하고 있다는 알람이 뜨길래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어떤 숙소들이 있나 구경이나 해보자며 방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대부분 예약을 재촉하는 알람은 거의 신경 쓸 필요도 없었지만, 웬걸 이번에는 정말로 숙소가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우선 여행 초반에 묵을 숙소라도 잡아둬야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검색을 하다가 '넵튜니아'라는 이름의 게스트 하우스를 발견했다. 사람들은 시설이 깔끔한 편이고 시내에서 떨어져 있어 시끄럽지 않았다는 장점과 언덕을 오르는 게 힘들었다는 단점을 평으로 남겨놓았다. 나는 언덕이야 좀 걸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천천히 사진을 둘러보다가 충동구매와 비슷한 '꽂힘'이 찾아와서 더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예약을 진행한 다음, 숙소에 대한 생각은 다시 무의식 깊은 곳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첫날 저녁, 나는 지도를 보며 발에 땀이 나도록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앞서 같은 게스트 하우스에 지낸 사람이 오가는 길이 하도 힘들어서 택시를 부르기도 했었다는 말을 백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또 걷지 못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여하튼 배낭을 멘 여행자에게 편한 길은 아니었음이 확실했다.


 한참 언덕을 오르다 한 골목으로 들어간다. 몇 개의 숙소를 지나고 폐가 뒷 편의 가장 깊숙한 곳에 내가 묵을 숙소가 눈에 보였다. 아기자기 한 외관의 첫인상이 딱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친절한 매니저의 안내를 받아 방을 둘러보니 나의 '꽂힘'이 틀리지 않아 보였다. 깔끔한 2층 침대와 욕실, 넓진 않지만 실용적인 주방, 밤이면 편안히 글을 쓰거나 독서를 할 수 있는 거실까지, 작고 소소한 분위기의 편안한 게스트 하우스였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받은 자그마한 러시안 애플(?)


 매니저는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배가 고프냐고 묻더니 '러시안 애플'이라고 웃으며 작은 과일을 하나 건넸다. '애플'이 맞긴 했는데 내가 알고 있던 크기보다 몹시 작았다. 한 주먹에 쏙 들어오는 그 미니 사과는 빛깔도 고와서 어찌나 귀엽던지, 나는 그것을 차마 먹지 못하고 머무는 동안 침대 한쪽에 고이 올려두었다. 그래서인지 넵튜니아는 나에게 그 과일과 같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작지만 잊을 수 없는 치명적인 매력의 그 러시안 애플처럼.

 



다국적 토크쇼


 홀로 여행할 때 숙소 예약에 크게 공을 들이지 않는 이유 중 다른 한 가지는, 나에게 중요한 요소가 결국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었다. 잠자리가 예민한 편이라 소음이 적은 숙소를 선호하는 편인데, 시내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고 조용하다는 평이 지배적인 숙소에 간다 한들 함께 지내는 사람들이 숙소를 시끄럽게 사용하면 말짱 도루묵인 경우가 태반이었다. 결국에는 내가 묵는 시기에 함께 숙소에 지내는 사람들이 어떠한가, 라는 게스트 하우스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운에 달려 있는 셈이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다른 여행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사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퍽 고독하게 넵튜니아에 머무르고 있었다. 첫날엔 아래층 침대에 머무는 한국인과 매니저 외에는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새벽까지 떠들어 잠을 깨운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조용히 해달라는 부탁하기도 했다. 굳이 사람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으면서 나만의 벽을 가지고 지냈다. 혼자 여행하면서 끊임없이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찾아오는 감정들을 마주하지 않고자 그랬던 것인지, 게스트 하우스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경험은 이제 충분하다는 정체불명의 오만함이었는지 확실히는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넵튜니아에 머무르는 마지막 날에는 어느덧 '다국적 토크쇼'의 참여자가 되어있었다.

 


 준비 없이 폭우를 만나 흠뻑 젖고 돌아온 날이었다. 따듯한 물에 샤워를 하고 주방에서 라면을 끓였다. 인덕션이 서서히 달아오르는 동안 냄비 앞에 서서 라면을 뜯고 있으니 안경을 쓴, 서른 좀 넘어 보이는 백인 남자 한 명이 대뜸 말을 걸어왔다.


"이거 네 거야?"


 순간 라면을 말하는 것인가 하는 착각이 들어서 흠칫했다. ‘같이 먹자고 물어보는 걸까?’라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멈칫하는 사이에 그는 냄비 옆에 놓인 국그릇을 가리켰다. 영어를 잘하는 이 덩치 큰 남자도 뭔가 요리를 해 먹고 싶어 하는 눈치였는데, 숙소에는 면을 옮겨 담기에 제격인 국그릇이 딱 하나뿐인 까닭이었다.


 다행히 국그릇을 사수하고 곧 잘 익은 라면과 '불곰 캔맥주'와 함께 주방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넵튜니아에는 게스트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용 테이블이 단 두 개뿐이었는데, 주방에 하나가 있고 거실에 하나가 있었다. 나는 주방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홀로 라면에 맥주를 즐기고 있었는데 야식을 먹으려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여행자들이 한 테이블에 모이니 자연스레 대화가 오갔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처음엔 언어가 쉽게 통하는 사람들끼리 대화를 하면서 몇 개의 주제들이 동시에 테이블 위를 날아다녔다. 나는 우리말을 워낙 잘해서 당연히 한국인일 것이라 착각했던 중국인 남녀와 한국인 여행자 몇 명과 함께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 영어로 대화를 나누던 이스라엘 남자와 홍콩 남자가 합류하면서 한국인, 중국인, 이스라엘인, 홍콩인이 동시에 참여하는 다국적 토크쇼가 시작됐다. 거기에는 러시안 매니저가 이따금 함께하기도 했다.


 통역사인 유이는 한국어와 중국어에 능했고, 다른 중국인인 찬은 중국어와 영어, 유창하진 않지만 한국어까지를 할 줄 알았다. 홍콩 남자는 영어와 중국어를 할 줄 알았고, 이스라엘 남자는 히브리어와 영어에 능통했다. 그리고 영어를 할 줄 알지만 그리 능하지는 못한, 나를 포함한 한국인들이 있었다. 다행히(?) 홍콩 남자와 이스라엘 남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한국말을 할 줄 알았고, 한국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찬이 영어에 능통해서 어느 정도 모두 함께 대화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수많은 국적의 사람들과 무슨 대화들을 나누었느냐고? 나는 영어 강사일을 하면서도 당신들과 영어로 대화하기가 어려운데 그것이 한국 교육의 문제점이다, 라는 자학적인 조크를 던졌다. 영어 강사일도 하고 글도 쓰지만 사실 내 전공은 영어가 아니라 경제학이라는 TMI(too much information)를 제공하기도 했다.


 조금 더 교훈적이거나 감동적인 이야기는 없었느냐고 묻는다면, 사실 그런 것들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러시아 현지 안주를 나눠 먹으며 맛이 이상하다면서 다국적 웃음소리로 킬킬거렸고, 누구는 불곰이 그려진 러시아 맥주를 마시는데 누구는 여기까지 와서 한국 맥주를 마신다며 실없는 대화를 주고받기도 했다. 찬은 시종일관 류승룡 씨(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배우가 맞다)를 넵튜니아에서 만났다며 함께 찍은 셀카를 만나는 사람마다 보여주고 다녔고, 나는 한국의 유명 배우와 같은 날 같은 숙소에 머무르면서도 그가 체크아웃을 할 때까지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는 사실에 원통해하기도 했다. 학구열이 강했던 이스라엘 남자는 자꾸만 한국어의 '습니다-'가 어떤 상황에 붙는 것인지 물어봤고 나는 그것이 나이가 많은 사람이나 초면인 사람에게 공손하게 쓰는 표현이라고 알려줬다. 그러자 그는 한국인 여자 한 명이 방으로 들어갈 때 '잘자요습니다~'하고 인사를 해서 우리를 한참 웃게 만들었다. 앞서 알려준 밤 인사말인 '잘 자요'를 스스로 응용한 것이었다.


 그 혼란스러운 밤은, 상상만 해도 즐겁지 않은가? 교훈적인 이야기는 없다. 잊을 수 없는 여행의 하룻밤, 다양한 언어로 펼쳐지던 그 날의 잡다한 이야기들이 오래도록 마음속에서 메아리치고 있을 뿐.



넵튜니아가 있는 골목길


 통제할 수 없는 요소인 '사람 운'이 좋았던 것일까. 나에게 넵튜니아는 그런 곳으로 남았다. 작고 소소한 대화들이 끊이질 않는 곳이자 여행자들이 부대끼며 웃고 떠들 수밖에 없는 곳. 주방에 테이블이 하나뿐이라 어쩔 수 없이 다른 나라의 여행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어느덧 정체불명의 다국적 토크쇼가 펼쳐지는 게스트 하우스. 다 같이 웃고 떠들던 밤이 지나면 다음날 아침에 다시 브런치를 먹으며 웃으며 인사를 건네곤, 각자의 여행을 찾아 다시 문을 나서서 떠나가는 그런 곳. 홀로 여행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시간이 지나면 이따금 외로움이 찾아오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다양한 감정들이야말로 우리의 여행을 채우는 소중한 편린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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