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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희 Oct 08. 2018

걸으며 여행하는 이유

낯선 길 위의 순간들, 그 강렬한 기억

 블라디보스토크의 도시 중심부에서 육지의 끝자락 땅끝 등대까지 약 8km. 택시로 이동해도 이곳에선 만 원이 채 안 나올 것이었지만 나는 이따금씩 두 발로 걷는 여행에 대한 애착(혹은 집착)이 생겨나곤 했다. 부지런히 걸으면 두 시간이면 충분할 것이고 어제 도착한 낯선 여행지의 길 위를 구경하며 천천히 걸어도 세 시간이면 닿을 수 있을 것이다. 도심에서 블라디보스토크의 땅끝까지 덜렁 지도 하나에 의존해 홀로 몇 시간을 걸어가는 그 여정이 왠지 끌려서, 나는 이번에도 걸어보기로 한다.






블라디보스토크가 끝날 곳까지 걸어보자


 블라디보스토크의 여행자들이 얼마나 밀도 높게 도심에 몰려있는지 느끼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해양공원에서 바닷가를 따라 한 시간이 채 안 되는 시간을 걸은 듯한데, 그 많던 여행자들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럴수록 눈 앞의 풍경은 더욱 낯설게 느껴졌고, 간혹 어딘가 으슥한 거리를 지나야 할 때면 무서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미리 고백하건대, 이날 나는 다소 겁이 없는 편이라는 스스로 대한 생각이 얼마나 후한 평가였는지 깨닫게 됐다. 여행을 통해 '나'가 꽤나 겁쟁이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또한 제법 유쾌한 일이었다.


해양 주립 대학교 인근, Dvimovsky beach 산책로


 지도만 믿고 걷다 보면 아주 가끔씩 뜬금없이 인도가 뚝 끊어지기도 한다. 이번에는 해양주립대학교 근처의 경치 좋은 바닷가 산책로를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갑자기 인도가 사라져서 차량들 바로 옆으로 걷게 되었다. 갓길에 바짝 붙어서 걷는 다곤 하지만 차들만이 다니는 도로 위에서 민폐가 된 듯 마음도, 그리고 몸도 편치 않은 상황이었다. 그럴 때는 대체 무얼 얻자고 이 끝도 보이지 않는 길을 걷고 있나, 싶은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이라 해야 할지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을 때면 여지없이 걸을 만한 길은 다시 등장했다.


 도시 중심부와 토카렙스키 등대의 중간 부분에 도달했을 무렵에는 지도 탐색에 혹사당한 휴대폰의 배터리도 바닥에 가까워져 있었다. 점점 낯설어지는 곳에서 내 두 다리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의존할 수 있는, 심지어 지도까지 포함된 그 기계마저 꺼진다면 정말 무서울 것 같아서 잠시 쉬어갈 곳을 찾아본다. 해양주립대학교를 기점으로 잠시 충전을 할 수 있을만한 카페도 보이지 않았지만 인간은 언제나 답을 찾는 동물이 아니었던가. 물을 사러 들린 마트 입구에서 ATM 기기 옆에 비어 있는 콘센트를 하나 발견했다. 짐을 내려놓고 대뜸 맨바닥에 주저앉았다. 여행자가 익숙하지 않은 동네에서 흔치 않은 행동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눈이 마주쳤다.


어디에 와있는지 모를 곳에서


 전력이 약한지 꽤나 오랫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야 했다. 왜인지 그 시간의 막막함, 그리고 이렇게라도 충전할 곳을 찾았다는 안도감, 행인들의 눈치를 보던 순간, 그 와중에 웃으며 눈을 마주쳤던 사람들, 그리고 처량하게 바닥에 놓인 배낭 같은 그런 기억들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불편했던 순간이지만 유쾌한 순간이기도 했다. 특별한 명소가 아니더라도 기억에 남을 장면이 되는 여행의 순간은 한없이 걷는 길 위에서 문득 찾아오곤 했다.




우연한 만남, 그러나 마음을 빼앗기는 장소들


 해안 도시 블라디보스토크의 육지가 바다로 돌출된 부분을 따라 하염없이 걷다가, 바다 가까운 한 언덕의 정상부에서 우연히 작은 공원을 만났다. 끝자락에 다와 가는 지점이라 언덕의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서 들어서자마자 마음이 탁 트이는 기분이 든다. 온통 러시아어였기에 누군지 알 수 조차 없는 하나의 동상을 지나 공원에 마련된 의자에 잠시 배낭을 내려놓는다. 천혜의 자연과 함께 인간이 쌓아 올린 도시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정취를 더하는 금각교와 루스 비교 같은 구조물들, 그리고 항해 중인 몇 척의 선박들까지. 해안이 가까운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끝내주게 멋진 곳이었다.


Skver Imeni A.i.shchetininoy, 내려다보는 경치

 

 'Skver Imeni A.i.shchetininoy'라는 이름의, 여행 명소로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 작은 공원에 사람이라곤 근처에 사는 현지인 몇 명이 전부였다. 비록 여행자들의 발걸음이 거의 닿지 않는 위치에 있지만, 이곳의 풍경을 보고 있자면 과연 도시의 숨은 명소임에 틀림없었다.


 시원한 바람이 머리칼을 흔들면 조용히 눈을 감고 싶은 곳. 인간의 말소리 없음이 침묵이 아니라, 오히려 바람에 잎이 흔들리고 바다에서 전해지는 자그마한 소리들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드는 그런 장소다. 이것은 여행의 가장 소중한 한 장면들 중 하나였다. 옥토퍼스 카페도 느낌은 달랐지만 도보여행 중 우연히 만난 장소임은 마찬가지다. 때로는 대책 없이 무작정 걸으며 여행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그 낯선 길 위에 이런 예상치 못한 순간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길을 잃더라도


 오전 11시에 해양공원을 떠나 오후 3시에 블라디보스토크의 끝자락에 도착했을 때, 마침내 저 멀리에 육지의 마지막 조각과 토카렙스키 등대가 보일 때의 그 짜릿함을 나는 잊지 못한다. 어쩌면 겨우 8km, 고작 네 시간이었을지 모르지만 여행자라곤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던 그 낯선 여정 동안의 불안감과 피로 같은 것들이 단 한 번에 씻겨 내려가는 순간이었다. 물론, 그 토카렙스키 만의 전경은 택시를 타고 와서 봤어도 끝내줬을 것임을 나는 보증할 수 있다. 하지만 하루 종일 블라디보스토크를 걷다가 마침내 그 끝자락에 섰을 때의 기분은 그것을 경험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사다난했던 여로의 기억들과 목적지의 풍경이 마침내 이어지는 순간에는, 진정으로 '나만의 여행'이라 부를만한 것이 반드시 탄생하게 된다.



'밤에는 어떨까?'


 그 호기심 때문에, 또한 지나온 기억이 좋아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마저 다시 그 길을 한 번 더 걸었던 것에 대해서 누군가가 병적인 집착이라 말한다면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에는 이름은 몰라도 경치가 끝내주는 공원이 있을 것이다. 나는 꽤 겁을 잘 먹으니 불안함과 안도함이 끝없이 교차하는 수많은 감정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가보지 못한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도 멀지만 언젠가 나타날 것이다. 이곳에 머무르는 7일 중 적어도 하루 정도는, 온 블라디보스토크를 두 발로 느끼기 위해 힘을 다해도 좋지 않을까.


 그래, 이번에는 밤의 블라디보스토크를 만나러 가자.


 어느덧 해가 저물고 밤 기운이 완연했지만, 나는 고집스럽게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올 때는 네 시간이 걸렸지만 감상을 조금 줄이면서 걷는다면 두 시간이면 될 것이었다. 기차역을 지나려면 조금 다른 방향으로 걸어야 했지만 어쨌든 한 번 다녀온 여정이라 길을 잃어버릴 염려도 적었다. 사실 좀 헤매도 괜찮다. 걷다가 처음 나온 마트에 들러서 음료를 두 캔 사서 배낭 양쪽에 꽂아 넣었다. 하나는 가는 동안 마실 콜라였고, 나머지는 이 여정이 끝나면 숙소에서 따듯한 물에 샤워를 하고 나온 다음에 마실 맥주였다. 불곰이 그려진 캔맥주!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와서 보니 딱 두 시간이 흘러있었다. 하루 종일 홀로 걸으며 외롭고 힘들기도 했던 그 하루 동안 나는 몇 차례나 가야 할 방향을 잃고 헤매야 했다. 하지만, 때로는 길을 잃어도 괜찮다. 그 순간마저 우리의 여행은 어딘가로 향하고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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