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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희 Oct 27. 2018

일단 가고 보자

대책 없이 루스키 섬으로

 대책 없이 루스키 섬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지 사흘째 되던 날의 아침, 아르바트 거리에서 식사를 하고 시내 중심부인 혁명광장으로 나왔다. 혁명광장 건너편의 오르막을 따라 조금 오르면 버스 정류장이 나오는데 하나를 지나치고 그다음에 나오는 정류장(Izumrud Mall)에서 루스키섬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다. 15번이나 29d를 타면 되고 요금은 23루블(한화 약 400원)로 몹시 저렴하며 시간은 한 시간이 조금 넘게 걸린다. 이 같은 필요한 정보들은 이미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혁명광장 앞을 방황하며 망설이고 있었다.  



혁명광장 앞, 스베틀란스카야 거리


 블라디보스토크의 루스키 섬은 보통 패키지를 이용하거나 혹은 여러 명이서 막심(Maxim)을 이용해서 다녀오는 경우가 많았지만, 나는 패키지여행은 선호하지 않았고 동행자도 없었다. 숙소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곳, 다리를 두 번(금각교와 루스 키교) 건너야 하는 섬까지 대중교통으로 혼자 다녀와야 하는 여정이다 보니 막연한 불안함이 찾아와 '갈까, 말까' 하는 망설이게 된 것이다. 길을 잃든 차가 끊기든 '지도 보고 걷기'만 할 수 있으면 어디든 괜찮았지만, 섬은 그렇게 돌아올 수 있는 곳이 아니기에 조금 겁이 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래도 망설임은 길지 않았고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15번 버스에 몸을 실었다. 여행에서 ‘할까, 말까’ 할 때는 웬만하면 해보는 것이 정답이었다. 불과 하루 전 토카렙스키 등대에서 맨발로 바다를 건널 때만 해도 그렇게 짜릿한 기억으로 남을지는 몰랐다. 비록 혼자라 해도 일단 가고 보자. 여행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또다시 눈을 반짝이게 만들 테니.


루스키 섬으로 가는 15번 버스가 루스키 교를 지날 때



루스키 섬 여행의 시작, 극동연방대학교


 섬으로 가는 방법만 알았지, 어느 정류장에 내려야 하고 어느 곳을 가봐야 할지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러다 루스키 교를 조금 지나서 보였던 커다란 대학교의 모습에 덜컥 버스에서 내렸다. 대책 없는 하차로 보일 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루스키 섬에는 도착한 셈이었고 이제는 어디로 걸어도 섬 위의 여행이었다. 버스에서 내리니 과연 커다란 섬이라 그런지 도로부터가 넓고 시원시원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리고 경치 좋은 섬의 입구에 걷기 좋은 대학 캠퍼스가 있다. 여행자는 자연스레 걸음이 이끌리는 곳으로 움직여본다.


극동연방대학교

 

 9월의 블라디보스토크는 대체로 맑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흐리고, 비가 오고, 다시 태양이 뜨기를 반복했다. 극동연방대학교로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왔다. 숙소가 멀고 배낭도 있어서 우산 없이 비를 맞기에 좋은 타이밍은 아니었다. 혼자서 '제발-'이라 중얼거리며 큰 도로를 건넜다. 캠퍼스로 들어갈 때는 대학교 정문이 먹구름 아래 새빨간 깃발을 흔들며 위압적인 기운을 풍겼다. 멋모르고 돌아다니다 쫓겨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걸음을 옮기니 곧 드넓은 캠퍼스의 전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때마침 다시 따스한 햇살이 비춘다. 십오 분여를 걸으며 이곳에 나를 쫓아낼 사람은 없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나는 탁 트인 거리에 짐을 내려놓고 주저앉았다.



 이름 있는 명소만을 찾아다닐 필요는 없었다. 대학 캠퍼스는 그저 이곳 사람들이 삶을 영위하는 장소 중 하나지만, 그처럼 사람들의 일상이 담긴 여행지의 풍경이 주는 감명이 무척 좋다. 그들에게는 일상이지만 나에게는 여행인 그 낯선 조화가 좋다. 그리고 이곳 극동연방대학교가 섬에 있는 대학교라는 소소한 특별함도 풍미를 더했다.



오늘도 하이킹 & 노빅 파크


 문제가 있었다면 섬까지 들어와 놓고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계획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었다. 루스키 섬은 면적이 넓어 걸어서 섬을 둘러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뱌틀리나 곶이나 토비지나 곶처럼 섬 끝자락의 멋진 자연경관을 보기 위해서는 다시 차를 타야 했는데 버스들의 배차간격은 적어도 한 시간이라 언제 올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배도 조금씩 고파오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으로 지도를 펼쳐보니 그나마 걸어가 볼 만한 거리에 '노빅 파크'가 있었다. 이곳에 있는 식당인 '노빅 컨트리클럽'이 방송에 소개된 적이 있어서 한국인들에게는 꽤나 알려진 곳이다. 섬 안쪽에는 마땅히 다른 식당도 없어 보였기에 나는 우선 노빅 파크로 걷기 시작했다.


루스키 섬 극동연방대학교에서 노빅파크로 걸어가는 길

 

 "아, 막심 부를걸."


 큰길에서 벗어나기 전에 택시를 불렀어야 했다. 아무리 도보여행을 좋아한다고 한들 섬에 있는 산 안쪽 깊숙한 곳에 위치한 노빅 파크를 걸어서 찾아가기로 한 것은 다소 무리한 선택이었다.  처음엔 루스키 섬의 경관이 훌륭해서 괜찮았지만 나는 어느샌가 산과 비포장 도로를 빙빙 돌고 있었다. 지도 앱은 사람이 걸을 수 없는 길을 경로라며 안내하기도 했다. 루스키 섬의 유원지에서 주말을 보내려는 사람들은 모두 차량으로 움직이는 듯했고 나처럼 걸어서 들어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 차량들이 뿜어내는 매연과 길 위의 흙먼지를 한 껏 뒤집어써야 했고, 인도도 없어서 도랑 같은 곳으로 차를 피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약 한 시간을 걸어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홀로 험난한 하이킹을 마쳐서인지 초록색 간판에 하얀 글씨로 쓰인 'NOVIK PARK'라는 간판이 감격스럽게 느껴졌다.


노빅파크 입구와 그 안의 노빅 컨트리 클럽 가는 길


 걸어오는 동안 배가 더욱 고파져서 식당부터 찾았다. 경치 좋은 테라스에는 자리가 없어서 안쪽에 들어와서 앉았는데 바쁜 종업원들은 나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검색을 해보니 한글 메뉴판이 있다고 해서 한 종업원을 붙잡고 물어봤지만 그런 것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메뉴판에는 수십 가지 요리가 있어서 나는 해석에 애를 먹어야 했다. 노빅 컨트리클럽은 러시아식 꼬치구이의 일종인 샤슬릭(Shashlik)이 유명한 곳인데, 메뉴판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샤슬릭이란 이름의 메뉴가 없었던 것이다. 블로거들이 포스팅한 한국어 메뉴판에는 분명 '돼지고기 샤슬릭'이라는 메뉴가 있었기에 혼란스러웠다.


 결국 종업원을 불러서 돼지고기 샤슬릭을 먹고 싶은데 메뉴판에 안 보인다고 하니, 그녀는 러시아식 케밥이 샤슬릭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와서 처음으로 먹은 음식이 '도너 케밥'이었기에 더욱 반신반의하며 돼지고기 케밥을 시켰고 약간 긴장한 채로 기존에 알고 있던, 야채와 고기를 토르티야로 돌돌만 그 '케밥'이 나올 것인지 기대하던 '샤슬릭'이 나올 것인지를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무려 40여분이 지난 뒤에야 드디어 음식이 나왔다.


노빅 컨트리 클럽, 돼지고기 샤슬릭(케밥)


 다행히 샤슬릭이 러시아식 케밥이라는 종업원의 말이 맞았다! 구운 고기와 함께 먹을 빵과 소스, 채소가 따로 나온 것을 보니 그제야 왜 '케밥'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인지 이해가 됐다. 다만 음식이 몹시 늦게 나왔기에 안도감으로도 지우지 못한 언짢음이 조금은 남아 있었는데, 샤슬릭을 한입 베어 무는 순간 그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이 휘발했다. 육즙이 풍부한 돼지고기 샤슬릭의 맛이 너무나 훌륭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양도 적지 않아서 두툼한 고기를 베어 먹을수록 느끼함이 올라오기도 했지만 상추나 양파, 토르티야와 소스를 곁들여 먹을 수 있어서 거뜬히 한 접시를 비울 수 있었다.


 만족스러웠던 식사를 마치고 노빅 파크 구경에 나섰다. 샤슬릭을 먹는 사이에 또 한 차례 비가 내렸던 것인지 대기가 촉촉이 젖어있다. 루스키섬이 블라디보스토크 현지인들의 주말 나들이 장소로 인기가 있다는 말을 증명하듯, 여행자들보다는 가족단위의 러시아 사람들이 많은 풍경이다. 루스키 섬과 바다가 만들어내는 한산한 유원지의 정취는 흐린 날씨를 아랑곳하지 않고 노빅 파크 곳곳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노빅 파크에는 바다 쪽으로 돌출된 부분에 나무의자가 놓여있는 사진 촬영 포인트가 있다. 그런데 나들이를 나온 러시아 사람들은 딱히 촬영에는 관심이 없어 보여서 나는 잠시 바다 위의 벤치를 독점했다. 바닥에 카메라를 세워두고 타이머를 맞추며 잠시 혼자만의 촬영을 만끽해본다. 여행 중일 때만큼은 타인의 시선에 대한 부끄러움이 사라지곤 했다.



 멋대로 마음에 드는 곳에 내려서 천천히 발이 가는 데로 걷는 루스키 섬 여행은 꽤나 고생스럽기도 했지만 역시나 몇 번이고 두 눈을 반짝이게 만들었다. 평화로운 섬 풍경의 노빅 파크를 나오면서, 이번엔 막심을 이용해 택시를 불렀다. 하지만 목적지는 블라디보스토크 시내가 아니었다. 노을이 질 때까지 많은 시간이 남지 않은 듯했지만 섬을 떠나기엔 아쉬웠다. 나는 다시 오늘의 여행을 시작할 것이다. 루스키 섬 더 깊숙한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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