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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희 Oct 28. 2018

하늘이 내린 풍경의 섬

루스키섬 안쪽, 광활한 들판과 뱌틀리나 곶


루스키섬 천혜의 자연으로


 막심으로 택시를 불러 루스키섬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내가 하차 장소로 지정한 위치는 Mys Vyatlina, 뱌틀리나 곶에 들어가는 입구 부근으로 노빅 파크에서 꽤나 먼 곳이었다. 그런데 큰 도로를 벗어나 산길로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저히 차로는 지나갈 수 없는 크기의 웅덩이를 만났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왔다는 운전석의 남자는 어떻게든 통과해보려고 이리저리 차를 움직여봤지만 허사였고, 나는 괜찮다며 정찰제 그대로 230루블을 건네고 내렸다. 조금 더 걸으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꽤 덤덤하게 택시에서 내렸지만 섬 깊은 산속에 인적이 드문 곳이라 솔직히 조금 무섭기도 했다. 걸어야 할 방향을 정하기 위해 지도를 한 번 확인해보곤 깊이 파인 웅덩이를 지나 산의 안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목적지에 닿기도 전에 금세 루스키섬의 멋진 자연 풍경이 나타났다. 초록색과 연한 갈색을 반씩 칠한, 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 광활한 들판. 그것은 일찍 내려서 걷기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광경이었다. 낯선 섬에서 한껏 움츠렸던 나는 어느덧 시원한 바람과 함께 들판 위를 달리고 있었다. 강한 바닷바람에도 이리저리 흩날릴 뿐 결코 꺾이지 않는 분홍빛의 갈대들 사이로. 몸도 마음도 날아갈 것만 같은 상쾌함이 밀려왔다.

 


 이토록 아름다운 천혜의 풍경이라니. 루스키섬 들판을 유랑하고 있으니 늦은 시간이었지만 시내로 돌아가지 않고 깊숙한 안쪽까지 들어온 것이 굉장히 잘한 일로 느껴졌다. 자연이 몹시 광활하다 보니 한 번은 혼자 쏘다니다 들짐승이라도 만나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다행히 러시아인들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웨딩촬영을 나온 커플이 있었고 주말을 보내는 가족도 있었다. 흩날리는 갈대들 사이에 파묻혀 행복해하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나도 이 눈부신 풍경을 공유할 사람이 한 명이라도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혼자 하는 여행은 때로는 좋은 순간이 도리어 쓸쓸함을 불러오기도 한다.


 하루 동안에도 몹시 변덕스러운 블라디보스토크 9월의 날씨, 그 덕분에 구름 낀 날씨라 하더라도 좋은 풍경을 두고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햇빛이 내리는 순간이 찾아오곤 했다. 나는 잠시라도 광활한 들판에 햇빛이 내리기를 바라면서 뱌틀리나 곶의 해안가로 걸었다. 그리고 바다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그 타이밍에 때마침 구름 사이로 태양이 튀어나왔다. 그때의 빛은 퍼즐의 마지막 조각과 같았다. 들판이 생기를 발하고 섬의 해안이 펼쳐지니 한 폭의 그림 위에 서 있는 듯했다. 눈을 뗄 수 없는 풍경이 사방에서 만개하니 나는 망부석이 되어 뱌틀리나 곶이 보이는 자리에 멈춰 섰다.


뱌틀리나 곶(Mys Vyatlina)

 

 루스키섬에는 북한섬이라 불리는 포인트가 있는데 정식 명칭은 토비지나 곶(Mys Tobizina)이다. 내가 방문한 뱌틀리나 곶과 더불어 루스키섬 트래킹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 중 하나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뱌틀리나 곶도 생김새가 비슷해서 루스키섬의 명소 두 곳이 모두 북한 영토를 닮아있다. 실제로 여행자들 중에서는 뱌틀리나 곶에 가서 그것이 북한섬으로 불리는 토비지나 곶인 줄 착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심지어 가이드 중에서도 뱌틀리나 곶을 북한섬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뱌틀리나 곶을 ‘가짜 북한섬’이라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가짜라고 부르기엔 그 모습이 아깝다. 또한 마음대로 다른 이름을 붙여놓고 가짜라고 하는 것도 조금 웃기지 않은가. 짙은 초록색으로 칠한 듯 두꺼운 S자 모양으로 바다 위에 떠있는 뱌틀리나 곶을 한참 바라보다가, 더 가까이 가보기 위해서 들판 아래로 걷기 시작했다.


 해안이 가까운 곳으로 내려가자 절벽과 그 아래 파도가 부서지기를 반복하는 또 다른 장관이 나타났다. 그 모습이 너무 장대해서 경외심이 일었다. 거친 해안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해수욕장을 떠올리기에는 너무나 날것 그대로의 바다였다. 어느덧 노을이 지고 하늘은 급속도로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나는 한참을 멍하니 그 바다와 파도, 절벽이 만들어내는 아찔한 풍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뱌틀리나 곶 해안가


 그러다 하늘이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을 짓기에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지만, 숙소로 돌아가는 길 위에서도 이 섬의 풍경은 몇 번이고 발걸음을 붙잡았다. 루스키섬에서 만난 장면들은 혁명광장에서 고민을 거듭한 끝에 버스에 오를 땐 예상치도 못했던 모습이었고 실로 기대 이상이었다. 그러니 여행 중 ‘할까, 말까’ 할 때는 해봐야만 한다는 생각은 이번에도 정답이었다. 루스키섬 천혜의 자연 풍경과 그 사이를 홀로 걷고 달리며 누비던 순간의 감정들, 낯선 섬에서의 그 모든 기억이 아주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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