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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희 Oct 29. 2018

이러다 죽을지도 몰라

루스키섬 깊숙한 곳에서 준비 없이 마주한 폭우


준비 없이 마주한 폭우

 

 비가 내렸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굵고 거센 폭우가 순식간에 머리칼을 적시고, 온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산속을 빠져나온 지 아직 얼마 지나지 않았고, 이곳은 비를 피할 장소라고는 한 점 보이지 않는 루스키섬 깊숙한 지점의 도로 위였다. 이 위치에는 어떤 대중교통도 다니지 않았다. 쉬지 않고 쏟아지는 빗방울에 스마트폰 화면을 터치할 수도 없어서 택시를 부르기는커녕 지도를 볼 수도 없었다. 이 미친 폭우 속을 얼마나 걸어야 할까, 눈앞이 캄캄해졌다. 배낭 위로는 물이 고이다 넘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천둥의 굉음은 짙은 공포감을 더했다.


 비가 잔잔히 내릴 때까지만 해도 루스키섬의 드넓은 대로변을 따라 걷는 것이 좋았다. 돌아갈 방법이 확실치 않아도 숙소로 가는 길이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자유로운 여행자라는 감상에 도취해서 늦은 시간도, 먹구름도 전혀 개의치 않고 걸었다. 그러나 상황은 순식간에 변했다. 뒤에는 러시아인 커플이 뒤따라 걷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도움을 받은 것은 없지만 그 상황에 혼자가 아니라는 것은 엄청나게 큰 위안이었다.


폭우가 내리기 전, 루스키 섬 도로 위에서

 

 곧 다른 한 무리의 러시아인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 주변에도 비를 피할만한 구조물은 하나도 없었지만 발밑의 도로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형태로 갈라져 있는 게 보였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루스키섬에서 버스가 다니는 가장 안쪽, 마지막이자 첫 번째 정류장인 장소였다. 버스정류장을 발견했다는 것은 천만다행이었지만 빗방울은 더욱 거세졌고 폭우는 점점 맨몸으로 견디기 힘든 수준이 되어갔다. 해도 완전히 저물어서 추위에 온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곳엔 버스가 몇 대 다니지 않고 배차 간격도 몹시 길어서 언제 탈 수 있을지 모르는 노릇이었다. 재수가 없으면 두 시간도 더 기다려야 한다. 여기서 계속 버스를 기다려야 하는지, 더 걸으며 비를 피할 곳을 찾아봐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 우선 도로에서 벗어나 풀숲의 나무 위로 몸을 숨겼지만, 상황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고 체온은 자꾸만 떨어져 갔다. 대여섯 명쯤 되는 주변의 러시아인들도 속수무책이기는 마찬가지인 모습을 보니 이러다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 와중에 한 남자는 비를 막을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는지 갑자기 바닥에 떨어진 나무판자를 양팔로 들고 벌을 서기 시작했다. 결과는 당연히 무용지물.


 ‘콰르릉-’하는 몹시 큰 천둥소리가 한차례 하늘을 찢고 나와 어두운 섬을 덮쳤다. 영화 같은 순간이었다. 장르는 공포 혹은 재난이나 지구 멸망. 모두가 거의 동시에, 홀린 듯 히치하이크를 시도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낯선 여행지에서 모르는 사람의 차를 얻어 타기가 불안하기도 했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누구라도 제발 조금만 루스키섬 바깥쪽으로, 아니 비를 피할 수 있는 어느 곳에라도 데려다준다면 엎드려 절도할 수 있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따금 스쳐 지나가는 차들은 무심할 뿐이었다. 하긴, 이런 폭우에 젖어 다리엔 흙탕물까지 흘러내리는 타인을 차에 태워줄 사람이 있기는 할까?


 그칠 기미라곤 코빼기도 안 보이는 물줄기에 정신이 불안정해지기 시작한 나는 주변의 아무나 붙잡고 어디로 가느냐고, “Where are you going?”이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상황이 심각해지니 누군가와 무슨 말이라도 섞고 싶었다. 혹시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이라도 발견하면 조금이라도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물론 러시아 사람들은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해서 대화가 잘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계속해서 말을 걸어야만 했다. 몹시 춥고 무서웠기에.


 그러다 조금 먼 거리의 커다란 나무 밑에 아까 뒤따라오던 커플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비를 피하기엔 어림없어 보였지만 우선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둘 사이에는 생전 처음 경험하는 폭우에 몹시 놀란 가여운 강아지가 젖은 몸을 움츠리고 떨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그들은 고맙게도 좁은 나무 밑의 한자리를 내주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난 러시아 사람들은 대게 무심하면서도 친절한 편이었다. 새하얀 강아지는 낯선 외국인을 보고 짖을 힘도 없었는지 얌전했고, 그대로 세 사람과 한 마리는 나무 밑에 들러붙어서 비를 견뎠다.


 그렇게 맨몸으로 얼마나 폭우를 견뎠을까. 한 시간이 조금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마침내 빗방울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아찔한 자연 풍경을 가진 루스키섬에서 준비 없이 폭우를 만나니 마치 대자연의 벌을 받는 것만 같았다. 아마 그 두려웠던 섬 깊숙한 곳에 나 홀로였다면 제정신으로는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쉴 새 없이 때려대는 물줄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고 체온은 계속해서 떨어지고 버스는 언제 올지 기약도 없는 그 상황에, 여행자라곤 나뿐이었던 러시아 어느 섬의 깊숙한 곳에서 아무런 대책도 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말도 통하지 않고 누군지도 모르지만 함께 비를 견디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위로였다. 그들이 비를 막아주진 못할지라도 혼자가 아니라는 그 사실 하나로 버틸 수 있었다.


 폭우가 조금 꺾이자 마침내 작고 노란 밴이 한 대 나타났다. 정류장 근처에 있던 남자가 나를 향해 지금 차를 타야 한다고 몹시 소리쳤다. 조금 전에 내가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던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 버스에 오르니 좁은 공간에 러시아인들이 가득했다. 그중에 영어를 할 줄 아는 남자 한 명이 나에게 목적지를 물어오기에 센터라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버스 안에서 몇 사람이 토론하기 시작했고, 아까의 그 남자가 자기가 내리는 곳에 함께 하차해서 15번 버스로 갈아타면 된다고 말했다. 내가 말을 잘 못 알아들을 때면 많은 이들이 거들어서 함께 설명하기도 했다. 참 든든한 러시아 친구들이었다.


 그렇게 다 젖은 몸으로 환승을 하고 다시 한 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익숙한 거리로 돌아왔다. 비는 멎었지만 머리카락에서는 아직도 물방울이 떨어졌다. 촉촉하게 젖은 블라디보스토크 시내를 보자 그제야 완연히 긴장이 풀리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몹시 다사다난했던 루스키섬의 하루였다. 즐겁고 황홀했으며 때로는 아찔하고 무모했지만 여전히, 그리고 다행히 나는 아직 여행길 위에 서 있다. 새하얀 폭우 아래의 기억은 또 나의 어딘가에 각인되고 내일은 다시 블라디보스토크의 쾌청한 하늘과 눈부신 태양 아래 여행이 시작될 것이다. 나는 아직 여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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