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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희 Nov 14. 2018

우수리스크로 가는 기차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수리스크로 당일여행 #1 기차에서

 끝없이 펼쳐지는 가을빛 들판을 달리는 열차 안에서 오롯이 홀로 된 여행의 시간, 러시아 연해주의 광활한 자연을 보고 있으니 지금까지의 삶이 멀어지는 것만 같다. 아등바등 살아가던 현실이 마치 아득히 멀고도 작은 것처럼 느껴진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종점인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에서 낡은 기차에 올라 우수리스크로 간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기차로 두 시간 반, 고려인들의 자취가 남아있는 연해주의 한 조용한 도시로.






가을빛을 잔뜩 머금은 연해주의 들판


 블라디보스토크 여행 5일 차, 당일치기로 우수리스크에 다녀오기로 했다. 아직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갈 곳이, 할 일이 많이 남아있었지만 이번이 아니라면 우수리스크에 가 볼 순간은 영영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랐다. 연해주 제2의 도시라 불리는 우수리스크는 20세기 초반까지 많은 고려인, 그러니까 새로운 희망을 품고 연해주로 이주해온 한인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 중 하나다. 그래서 우수리스크에는 그들의 발자취를 기록하기 위해 건립된 ‘고려인 문화센터’를 비롯해서 지난 우리 역사의 흔적들이 조금씩 남아있다고 한다. 나는 먼 이국땅에 남겨진 그들의 자취를 직접 두 눈으로 밟아보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으로 향했다.


 잠시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다고 하니 작은 친구가 숙소 앞에 깜짝 배웅을 나왔다. 예상치도 못해서 흠칫 놀랐다. 어쩌다 이렇게  딱딱한 육지까지 흘러왔는지 모를 검붉은 게 한 마리가 지긋이 나를 바라봤다. 아무리 블라디보스토크가 해산물이 유명한 도시라지만 시내 한복판의 게라니. 가까이 다가가 봐도 미동조차 없는 녀석을 어떻게 할까, 하다가 놈의 운명에 개입하지 않기로 하고 지나쳤다. 조금 걷고 있는데 뒤쪽에서 한바탕 소란스러운 대화가 오갔다. 누군가 작은 친구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그 게가 결국엔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지만 알 길이 없었다.


호스텔 이즈바 앞에서 발견한 게


 탑승할 기차는 오전 11시에 출발할 예정이었는데 놓치면 다음 열차는 오후 5시 10분에 있었기에 넉넉하게 역으로 갔다. 그 위치가 횡단철도의 종점이고 또 시내에서 가깝기 때문에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은 언제나 붐볐다. 이곳과 우수리스크를 오가는 기차는 하루에 세 대뿐이라 여행지에서 또다시 낯선 도시로 당일치기 여행을 간다는 게 조금 두렵기도 해서 긴장이 됐다. 혼자 여행하는 처지에 우수리스크라는 생소한 곳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거나 기차를 놓치기라도 하면 어떡할까, 하는 걱정이었다. 물론 이 여행기를 여기까지 읽어온 독자라면 알 거다. 그래 놓고 또 일단 가고 볼 것임을.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


 200루블(한화 약 3,500원)을 내고 표를 구매했다. 두 시간 넘게 기차를 타는 것치곤 저렴했다. 그리고 곧 시간이 되어 열차가 왔는데 가격에 걸맞은 낡은 모습이었고 게다가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앉을자리가 없었다. 한국인 단체 관광객이 한 팀 있어서 잠시 대화를 나눴는데 그들은 우수리스크로 간다고 하더니 오십 분가량이 지나자 모두 내려버려서 나는 다시 혼자가 됐다.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은 사라지고 홀로 한 시간 반가량을 더 달려야 해서 열차 안을 둘러보니 어느새 빈 좌석이 많이 늘어있다.


 이 기차의 좌석이 독특한 점은 기본적으로 양방향인데, 앞뒤로 의자가 하나의 등받이에 연결되어 있어서 모두가 90도의 자세를 유지하며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장시간 이동한다면 편할 리가 없는 조건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선착순 좌석임에도 타인의 시선 따윈 개의치 않고 옆으로 드러누워서 가는 사람들이 가끔 보인다.

 

 내가 앉은 곳의 옆자리에는 우연히도 한국인 가족이 있었는데, 백발이 지긋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식인 두 남매로 구성된 여행팀이었다. 말을 많이 섞진 않았지만 왠지 이 길 위에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든든해졌다. 점점 기차에 적응도 되면서 긴장이 풀렸고 때마침 어떤 걱정거리든 날려 보낼 만한 광활한 러시아의 자연 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가을빛을 잔뜩 머금은 연해주의 들판과 높은 하늘, 나는 창밖의 세계로 천천히 빠져들었다.



 열차는 많이 낡았다. 이 오래된 철마의 나른함에 의식이 몽롱해진다. 러시아의 시골 마을 하나가 나타났다가 빠르게 사라진다. 칙칙폭폭 거리는 소음과 함께 바다와 초원을 달리는 정취에 온 마음이 사로잡힌다. 분명한 목적지를 정하고 오른 길인데도 자꾸만 어디로 향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반복적으로 떠오른다. 나는 정말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걸까. 때로는 지금껏 매달려온 생의, 그 모든 것들의 의미가 휘발하고 단지 어디론가 실려 가는 ‘나’만이 존재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에 마음이 잠식당한다. 아등바등 살아가던 현실은 기억 저편의 일인 듯 멀어진다. 이 드넓은 세상에서, 어쩌면 그 지구마저 창백한 하나의 푸른 점일지 모르는데, 나의 세계는 어찌나 작고 희미한 것일까. 그러나 열차는 멈추지 않는다.


12시 53분의 기차역


 그러다 문득, 목적지로 가는 길에 만난 빨간 지붕의 작은 기차역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내 기억 속에 영원히 12시 53분으로 남아있을 이름 모를 자그마한 역의 이미지가 짧은 순간에도 강렬히 남았다. 낡은 열차 안에서 얄팍한 사유가 난무하며 마음을 어지럽히던 순간에 그 소박한 기차역이 왜 위안이 되었을까. 왜 금세 다시 여행의 설렘을 가져다주었을까. 이것은 정말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축복인지도 모른다.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열차는 부지런히 달려와 어느덧 내릴 시간이 다가왔다. 나는 다시 홀로, 시원한 바람과 함께 걸음을 내디딘다.


우수리스크 기차역


 우수리스크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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